[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걷는다는 것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걷는다는 것
  • 하동뉴스
  • 승인 2023.03.2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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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것

                                      장옥관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문학동네, 2022)

【시인 소개】
장옥관 /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황금 연못』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외 다수. 김달진문학상, 일연문학상, 노작문학상, 김종삼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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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복판에는 노랗게 우둘투둘한 점자책처럼 시각장애인을 위한 길의 등뼈가 있지요. 차도로 다닐 때는 안 보이는 길이고, 인도로 다녀도 마음이 없으면 안 보이는 길입니다. 그 길은 마음을 열고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비장애인들에 가려진 장애인들이 비로소 보이듯이 말이지요.
일반도로는 눈으로 보고 다리로 걷습니다. 하지만 저 노란 길은 지팡이로 두드려서 발바닥으로 읽어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목적지까지 가려면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생고무 혓바닥”으로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하는 길이지요. 마치 온몸을 내던지듯이 오체투지하는 티베트의 순례길처럼요. 시각장애인을 업고 이승을 더듬더듬 건너가는 저 길의 허리는 얼마나 시리고 아프겠어요. 
‘걷는다는 것’은 상호적입니다. 사람이 길을 걷는 동안 그 길은 그 사람을 걷습니다. 길과 사람은 둘이 아닙니다. 하여 보행은 온몸으로 길을 ‘읽는 일’이고 ‘핥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걸어온 길을 등짝에 새기게 마련이지요. 온몸으로 핥아온 시린 길을 말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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