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이레이저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이레이저
  • 하동뉴스
  • 승인 2024.07.09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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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레이저

                                   진효정

세상을 믿었던 적이 있다

내가 웃으면
내 그림자도 웃는 줄 알았다

하루가 끝나고
내가 나를 지우는 시간

지워지는 내가
지우는 나를 보는 시간

딱딱한 미소를 지우면
뽀얀 슬픔이 드러날 줄 알았다

슬픔도 사치인 줄은 몰랐다


-계간 《다층》(2024년 여름호)


진효정 / 경남 하동 출생. 2014년 『시와경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 『일곱 번째 꽃잎』 『지독한 설득』이 있음. 이병주문학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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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업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정해진 감정표현을 연기하는 일을 말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일이 업무의 40% 이상이면 감정노동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서비스직뿐만 아니라 일반 직장에서도 인간관계나 권력관계로 인한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경우도 이에 해당됩니다.
이 시는 감정노동자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 “믿었던 세상”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내가 웃어도 “내 그림자”, 즉 내 마음은 웃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하루를 끝내고 화장을 지우듯이, 하루치의 웃음을 지우는 시간은 맨얼굴의 나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딱딱한 미소를 지우면/뽀얀 슬픔이 드러날 줄 알았”는데 (나는) 슬픈 표정조차도 짓지 못합니다. 체념이 일상이 돼버린 탓입니다. “슬픔도 사치인 줄은 몰랐다”는 마지막 구절은 모든 감정이 사라진 감정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짐작하게 합니다.
생계형 노동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최악의 노동은 스스로를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감정노동이 아닐까요. 내가 나를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감정노동의 이면에는 ‘진상’과 ‘갑질’이라는 자본주의의 일그러진 얼굴이 있습니다. 이 시의 화자(話者)는 ‘일그러진 영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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