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
성명진
어스름 녘
희미하게 염소 몇과 노인이
언덕길에서 내려
마을 길로 들어오고 있다
천천히 걸어오다가
노인이 누구와 만나 한동안 얘기할 때
염소 지들끼리만 온다
노인을 거기 그냥 놓아두고
저녁에게 주고
어스름에 덮여
슬며시 잊히게 두고
- 시집 『몰래 환했다』(파란, 2024)
【시인 소개】
성명진 / 199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199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 순간』 『몰래 환했다』, 동시집 『축구부에 들고 싶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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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녘에 노인이 낮 동안 풀어놓았던 염소 몇 마리를 몰고 언덕길에서 내려와 마을길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노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라오던 염소들은 가끔씩 서로 뿔을 티격태격 부딪치며 장난질을 하겠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노인은 염소들을 몰고 희미해지는 마을길을 들어옵니다.
천천히 걸어오다가 누구를 만나서 인사를 주고받는데 하필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기다리던 염소들은 노인을 두고 지들끼리만 집으로 옵니다. “노인을 거기 그냥 놓아두고/저녁에게 주고/어스름에 덮여/슬며시 잊히게 두고” 그렇게 돌아옵니다. 서로가 서로의 길을 순순히 따르는 이 ‘순명(順命)’의 풍경은 얼마나 평화롭고 정겨운가요.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이젠 시골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노인도 있고 저물녘도 있는데 저런 풍경은 없지요. ‘지들끼리만 돌아오는’ 염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령사회의 시골 저녁은 평화롭고 정겨운 대신 적막하고 괴괴하지요. 노인들만 놓아두고 염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김남호 /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