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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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19.05.0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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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낳아주되 갖지 않는다

◆감꽃이 훨훨 떨어지듯
少私寡欲   소사과욕한다면

令有所屬(영유소속)
見素抱樸(견소포박)
少私寡欲(소사과욕)

맡은 바를 간직하기를 가르쳐 훈계하라. 검소함을 살피고 질박함을 포용하게 하고, 제 몫을 적게 하고 욕망을 적게 하라.  『노자』19장 참조

왜 세상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사나워질까? 따지고 보면 그 해답은 매우 간명하다. 모든 사람들이 제 것을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자 아우성치고 발버둥치는 까닭이다. 날로 치열하게 상쟁해서 이겨야 제 몫을 더 많이 챙길 수 있는 세상으로 치닫다 보니 이세상이 온통 격투기장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바야흐로 경쟁의 시대라고 선언하면서 서로 겨루어 이길 수 있도록 상대보다 강한 힘을 길러내라 독려하는 세상이다. 마치 이 지구 땅덩이가 온통 로마의 콜로세움 같다는 가위눌림을 당하게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험한 세상을 고쳐보자고 이런저런 처방들을 늘어놓지만 그 처방전이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꼴을 면하기 어렵다. 코끼리 발을 만져본 사람은 발만 가지고 코끼리라 하고, 코끼리 귀를 만져본 사람은 귀만 가지고 코끼리라 하고, 꼬리를 만져본 사람은 꼬리만 가지고 코끼리라 하고, 주둥이를 만져본 사람은 주등이만 가지고 코끼리라 하고, 다리를 만져본 사람은 다리만 가지고 코끼리라며 서로 다투듯 사나운 이 세상 진단서들이 요란하지만 코끼리 오장육부를 만져보지 못한 탓으로 손써볼 수 없듯이 이 세상 속이 병들어 있음을 젖혀두고서 세상 몸뚱이만 가지고서 이러쿵저러쿵 콩팔칠팔 해보는 꼴이다. 이 세상이 거칠고 사나운 탓은 사람의 몸뚱이가 아니라 오로지 사람속이란 불멸의 진단서는 이미 2500년 이전부터 떡 넉 자로 마련돼 있다. 그 사자의 진단서가 보로 <소사과욕>이다.

소사는 사를 적게 한다는 말이다. 사란 여기선 내 몫이라는 뜻이다. 내 몫을 적게 한다는 것이 곧 소사이다. 과욕은 욕을 적게 한다는 말이다. 욕이란 내 몫이 남의 것보다 크고 많아 내가 좋아야 한다는 속셈이다. 그런 속셈을 적게 한다는 것이 곧 과욕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 소사하여 과욕 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세상은 밝고 맑아져 사람들은 서로 오순도순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날마다 정신없이 빨리빨리 숨차게 사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사하고자 과욕을 부리는 탓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놈의 다사를 소사로 바꾸고 이놈의 과욕을 과욕으로만 바꿀 수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넘치는 욕심의 아수라장’이 될 리가 없을 터이다. 내 몫을 크고 많게 하여 욕심을 넘치게 하자니 사람들이 서로 겨루고 다투어 세상이 거칠고 사납고 시끄럽다는 진단은 인간의 마음속을 완벽하게 진맥한 결과이다. 이 천하에서 사람만 빼면 온갖 다른 목숨들은 소유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만 소류를 욕으로 삼는다. 그래서 사람한테만 소유욕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온갖 목숨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먹이 다툼을 치열하게 한다. 산짐승이 바위나 나뭇등걸에다 영역 표시를 하기도 하고 다람쥐나 여우는 훗날 먹이로 감춰둘 줄도 안다. 그러나 숨겨두 되 자물쇠까지 채울 줄은 모른다. 배부르면 그것으로 다 만족하니 게걸스럽지가 않다. 오로지 게걸스러운 탐욕은 인간한테만 있는 불행의 늪이다. 탐욕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애달프게 살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감나무라는 말이 이젠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있었다. 초여름 무렵이면 감나무마다 감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눈 내린 듯이 하얗다. 그러면 바람이 세차지 않아도 감꽃은 한 사흘에 걸쳐 절반 넘게 훨훨 떨어진다. 감나무 밑은 마치 여름에 눈서리가 내린 듯하고, 떨어진 감꽃을 보고 감 열매들이 잘 맺어 영글겠다며 고마워들 했다. 감꽃마다 감을 맺으면 감나무가 힘이 모자라 열매를 다 영글게 못 하니 서슴없이 절반쯤을 미리 땅에 버린다. 그래서 감골 노인들께서 시역소사라고 칭찬했다. 감나무는 역시 제 몫을 적게 하여 가을이 되면 감을 주먹만 하게 키워내니 소사과욕 할 줄 안다고 감나무를 칭송했었다.


◆새끼 딸린 노루는 사냥하지 않는다.
 貴食母 귀식모라네

我獨頑且鄙(아독완차비)
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
而貴食母(이귀식모)

(사람들한테는 모두 할 일이 있다지만) 나만 오직 고집스럽고 또 비루하다. 나만 중인과 달라서 모기를 먹음을 귀히 한다. 『노자』20장 참조

이제 보릿고개를 아는 사람들은 70대를 훌쩍 넘겼는지라 배고픈 설움을 겪어본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배고팠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 무슨 청승떠는 소리냐며 손사래 치는 세상이 되었다. 보릿고개 시절까지만 해도 우리는 자연에 안겨 살았다. 자연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라고 믿고 여기며 따랐다. 자연이라는 어머니를 받들어 모시는 것을 일러 <귀식모>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을 뺀 다른 목숨들만이 변함없이 먹고 자며 제 새끼 치는 짓을 하면서 자연의 품에 안겨 살다가 간다. 아이스크림도 골라 먹는 세상이 되면서 우리는 이제 모기를 받들어 모시기를 잊어버리고 만 셈이다. 모기란 모유라는 말과 같다. 따지고 보면 산천초목에 널려 있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의 어머니가 주는 젖이다. 그런데 인간만 인간의 먹을거리는 인간 스스로 만들어 먹는 듯이 오두방정을 떨다 보니 요리인생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들리는 것이다. 오죽하면 TV 등에 나 자연식한다고 떠들어대는 프로까지 나오겠는가? 요새처럼 흥청망청 먹어치우면서 살아도 되는 것인지 겁날 때가 잦아진다. 1950년대 말에는 못난 애비어미한테 태어난 죄로 어린 딸년이 식모살이하러 도시로 떠났다는 한숨소리를 시골 어는 고을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뒤로 식모라는 말은 업신여기는 호칭이 되고 말았다. 이만큼 인간이 오만불손해지다 보니 귀식모의 <식모>라는 낱말을 귀담아달라고 하기가 오히려 거북살스럽기도 하다. 젖 먹여주는 어머니를 받들어라. 이런 말을 어린이들한테 말해주기도 민망하다. 왜냐하면 요즈음 갓난애는 대부분 모유가 아니고 소젖을 먹고 자라지 않느냐는 삿대질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지라 초유를 입에 물렸고 거의 반년이나 모유를 먹였노라 큰소리치는 엄마가 훌륭해 보이는 세상이 되었다. 엄마가 갓난애한테 젖먹이는 일이 자랑거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핏덩이를 젖가슴에 꼭  껴안고 산고를 함께 나누는 산모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귀식목의 깊은 속뜻이 절로 드러난다. 그러면 천지만물을 낳아준 자연을 왜 어머니로 모시고 받들어야 하는 지 나름대로 터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핏덩이를 손수 닦아내는 산모를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으니 여전히 귀식모라는 말씀은 어렵게 들리겠다. 말끔하게 씻기도 강보에 싸서 간호사가 들고 오면 그제야 산모가 자신이 낳은 애와 상면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귀식모라는 말씀이 뚱딴지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끼 딸린 노루는 사냥감이 아니라 그 새끼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냥꾼일지라도 그 새끼의 어미를 향해 불질할 수 없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 귀식모에 담긴 깊은 뜻이라고 여겨도 된다. 자연을 물건으로 믿는 사람과 자연을 어머니로 믿는 사람 중에서 누가 바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애꾸 원숭이 마을의 투표결과처럼 될 것이다. 옛날 원숭이 백 마리가 모여 사는 마을 있었단다. 그런데 딱 한 마리가 두눈박이였다는 거다. 그래서 어느 놈이 바보병신인지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단다. 개표 결과는 99대 1로 두눈박이 원숭이가 바보병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귀식모하자고 하면 아마도 두눈박이 원숭이 꼴이 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똑똑한 쪽보다 바보등신이 되어주는 쪽이 훨씬 더 마음 편할 때도 있다. 때로는 바보가 되어주는 편이 마음속이 밝고 맑아 가벼워져 홀가분할 수 있다. 아등바등하다 보면 생채기만 남고 지붕 위의 닭 좇던 개꼴이 되기 쉽다. 바보 되는 셈 치고 자연은 낳아 먹이고 길러주는 어머니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귀식모>를 귀담아둔다면 그만큼 마음이 편해 개운해질 수도 있다.


◆제멋대로 보지 않으면 밝다
不自見故明(부자현고명이라)


不自見故明(부자현고명)
不自是故彰(부자시고창)
不自伐故有功(부자벌고유공)
不自矜故長(부자긍고장)

멋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밝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며, 자신을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보람을 갖고, 스스로 뽐내지 않기 때문에 장구하다.『노자』21장 참조

뱀눈 같다고 흉보지 말라는 것이다. 뱀눈이 좁쌀만 해도 제 볼 것은 다 보면서 기어다닌다. 그 작은 눈깔로 두꺼비를 만나면 숨거나 피해 가고 개구리를 만나면 잽싸게 물어 밥으로 삼는 뱀눈을 어찌 흉보겠는가. 황금에 눈이 어두워 그만 덜컥 물고 마는 청맹과니 눈길은 사람에게만 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께서는 집안의 목매기 같은 젊은이들한테 “청맹과니 안 되고 싶다면 부디 자견해서 자현하지 말거라” 쩌렁쩌렁했었다. 물론 요즈음 그런 늙은이는 집안에서 왕따 당하고 말 게다. 두 눈 멀쩡해도 뱀눈보다 못한 사람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 뱀은 두꺼비는 두꺼비로 보고 개구리는 개구리로 보기 때문에 두꺼비 독으로 제 목숨 앗기는 험한 꼴이란 없다. 그러나 사람은 미끼를 미끼로 보지 못해 덥석 물기도 하고 덫을 덫으로 못 보고서 덤벙 밟아 치도고니 당한다. 무엇을 제멋대로 보는 짓을 자견이라 한다. 말하자면 미끼를 먹이구나 제멋대로 보고 범하는 짓 따위가 자견이다. 자견하면 누구나 졸지에 눈뜬 봉사가 되고 만다. 그런데 자견은 그것으로만 그치질 않고 반드시 자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미끼를 쳐들고선 먹이를 구했노라 자신을 드러낸다. <볼 견>이라는 자가 <드러낼 현>으로 이어지면 등신 되고 만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겼고, 사물을 제멋대로 보고 서 제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쭐대는 사람 탓으로<당랑지부>라는 말씀도 생겼다. 버마재비의 도끼란 자리를 과시하는 극치를 말한다. 버마재비가 여치를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수레가 달려와 그 소리에 여치가 휙 날아가버리자 버마제비는 수레 탓이니 수레를 혼내주겠다면 한길로 나가 앞 두 발을 쳐들고 맞선단다. 수레는 휙 지나갔고 그 바퀴자국에 버마재비 몸뚱이만 다림질당해 남았다는 얘기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겠다. 자견하면 이런 꼴 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제멋대로 보지 않는 사람은 밝다고 한다. 눈이 밝은 사람은 마음이 밝고 마음이 밝은 사람은 헤아림도 밝다고 한다. 본래 명안이란 육안이 밝은 마음과 이어져 있는 눈길을 말한다. 제멋대로 보는 눈이란 밝지 못한 마음 때문이지 얼굴이 있는 두 눈 탓은 아니다. 본래 명안이란 안경집에 가서 검안한다고 알 수는 없다. 사물을 보는 눈길이 마음먹기 따라 서로들 자견하기에 백인백색이 벌어지는 것이다. 서로들 자견하므로 꽃빛깔 하나를 두고서도 붉으니 푸르니 아웅다웅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두 눈은 사물을 제대로 보질 않고 저마다 욕심대로 바라보다 보니 불명해진다. 왜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할까? 이는 저마다 자견하면서 이거다 저거다 겨루려는 아우성 때문이다. 물가에 있는 돌덩이가 부처님 꼴을 닮았다면 부처님 같다고 말한들 말거리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저 돌 모양이 너무 좋으니 정원에 갖다놓으면 좋겠다고 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돌이 돌로 보이지 않고 돈 될 물건으로 보이게 되면 그 돌덩이를 제멋대로 저울질해 값을 매기고 탐욕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무슨 탐욕이든 마음속을 외곬으로 몰아간다. 산들바람도 바람골을 만나면 돌개바람으로 표변하듯 탐욕의 마음은 두 눈에다 돌개바람 대롱을 달아주어서 자견은 늘 어디서든 관견으로 이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관견이란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대롱을 통해 표범을 보면 점박이만 볼 뿐 표범은 못 보는 꼴이 관견이다. 자견에서 비롯한 관견이 편견을 낳아 세상을 어지럽힌다. 그러니 세상 물정을 제멋대로 보고 우쭐거리지 말라는 말씀이 <부자현고명>이다. 물론 여기<밝은 명>은 두 눈의 밝음이 아니라 마음속이 밝다는 말씀이다. 글/ 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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