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연재]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 하동뉴스
  • 승인 2019.07.23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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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는 까치 소리 내고

善言無瑕謫 선언무하적이라

善行無轍迹(선행무철적)

善言無瑕謫(선언무하적)

善數無用籌策(선수무용주책)

善閉無關楗而不可開(선페무관건이불가개)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결무승약이불가해)

자연의 운행에는 굴러간 흔적이 없고 자연의 말에는 잘못이나 꾸지람이 없으며 자연의 셈에는 산가지를 씀이 없고 자연의 닫음에는 빗장이 없어도 열 수 없으며 자연의 물음에는 실끈이 없어도 풀 수 없다. <노자 27장 참조>

선언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선언이란 자연의 말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선언은 귀에 들리는 말보다 눈에 보이는 말이 한없이 더 많다. 바람소리 물소리 우렛소리 그리고 짐승 새 벌레들이 내는 온갖 소리들은 모두 귀에 들리는 선언이다. 귀에 들리는 자연의 소리 말보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소리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다. 한 그루의 나무만 보더라도 철따라 그 모양새와 색깔을 달리 보여준다. 따지고 보면 자연의 온갖 것들은 눈으로 보게 하는 선언 아닌 것이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선언은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셈이다.

자연을 다른 말로 신이라 한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참으로 선하기 어렵다. 이 천지에서 자연과 달리 말하는 목숨은 사람밖에 없다. 사람의 말은 전혀 자연이 아닌 말이다. 사람의 말에는 저마다 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되 그 뜻에는 시비가 있고 호오가 있어서 걸림 없이 통할 수 없다. 자연에는 본래부터 기다 아니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차별이나 분별이 없어 걸림이란 없는 말이다. 오로지 사람의 말만 이러니저러니 겨루고 우기고 따지는 줄다리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선언에는 그런 줄다리기란 아예 없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느니 세 치 혀가 탈이 난다느니 낮말을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느니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느니 별의별 말의 속담이 빚어짐은 사람의 말이 어 다르고 아 다른 까닭이다. 사람의 말에는 흠이 많아 아옹다옹 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의 말은 흠투성인지라 서로 꾸짖기를 마다 않아 사람은 말을 결국 너절하고 하고 더럽히게 된다. 이러다 보니 언유하적이라는 말이 생가는 것이다. 말로써 싸움하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다.

까치는 까치소리 내고 까마귀는 까마귀 소리 내면 그만이다. 여치는 여치대로 뛰고 메뚜기는 메뚜기대로 뛰면 그만이다. 상수리나무는 저대로 그냥 말하고 소나무는 저대로 그냥 말한다. 상수리나무가 소나무에게 네 잎은 왜 바늘 같고 사철 푸르냐고 따져 꼬집지 않는다. 사람을 빼고 온갖 것들은 하늘땅 사이에 살면서 그냥 그대로 저마다 훌륭할 뿐이다. 그래서 어려운 말씀으로 <선언무하적>이라 한다. 이처럼 자연에는 하직이란 하나도 없다. 선언이란 흠이 없고 그러니 꾸짖을 것도 없는 말씀이다. 이는 곧 선언이란 그 말이 자연이라는 말씀이다. 자연이란 그냥 그대로 온전하다는 말로 새기면 된다. 그러니 선언이란 그냥 그대로 온전하여 흠이 없어서 꾸지람 받을 리 없는 말씀이다. 사람도 이러한 선언을 본받는다면 절로 그냥 선인이 된다. 물론 선인이란 자연인이라는 말씀이다. 그 사람 착하다고 세상이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곧 자연과 같은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사람한테는 선악이 있는 사람의 마음 짓들이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다. 물론 사람은 선한 마음이 악한 마음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이(理)가 있다고 한다. 이 이를 요새는 이성이라 한다. 특히 조선시대 이를 강조했던 까닭이란 심정에서 심성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정에서는 온갖 시비들이 용트림하지만 심성에서는 그런 시비가 말끔히 씻어져 선해진다. 심성이란 자연의 마음을 말한다. 사람도 말로써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그 말이란 곧 사람도 언제나 늘 할 수 있는 선언 그것이다.

◆자승에는 이기고 짐이 없다

自勝者强 자승자강이라

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

自勝者强(자승자강)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을 취함이고 자신을 이기려는 것은 무릅씀이다. <노자 33장 참조>

힘자랑한다. 힘이 세다. 힘이 없다. 이런 등등의 말은 사람은 저마다 힘을 갖고자 함을 드러낸다. 힘이 없으면 못 산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살 수 있게 하는 그 힘이란 무엇일까? 그 힘이란 몸뚱이의 근육이 낼 수 있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한테는 여러 가지의 힘이 있다. 근력도 갖고자 하고, 재력도 갖고자 하고 나아가 권력도 누리고자 한다. 요새는 누구나 재력은 곧 권력이라고 서슴없이 단언하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요새 사람들은 누구나 재력을 무엇보다 먼저 취하고자 한다. 권력이 되어주는 재력은 자신을 풍족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남에게 군림할 수 있는 힘을 낸다고 지금 세태는 믿어 의심치 않는 꼴을 거침없이 보인다. 그래서 이제 힘이란 강력함이 아니라 역력함이라는 생각이 압도해 승패라는 낱말을 잘 알아도 승강이라는 낱말은 거의 잊힌 꼴이다. 힘에는 두 갈래가 있다. 내가 남을 이기려는 힘이 있다. 그런 힘을 일러 역이라 한다. 또한 내가 나 자신은 이겨내는 힘이 있다. 이런 힘을 일컬어 강이라 한다. 이 강이라는 힘은 사람한테만 있는 힘이다. 왜 이 땅덩이에서 인간만 문화 문명을 누리고 사는 목숨이 되었을까? 사람이 여타의 동식물보다 머리가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사람은 다른 목숨들이 낼 수 없는 강의 힘을 알고 스스로 발휘하여 삶의 온갖 값어치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변화와 질서를 함께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이란 강에서 나온다. 우리는 정신력이나 창조력이니 거치적거림 없이 편하게 쓴다. 그러나 정신력-창조력이라는 낱말에 붙어있는 ‘역’자를 노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본다면 걸맞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정신의 힘인 창조란 스스로 제 마음을 남김없이 다 쏟아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체력으로 말한다면 사람은 참으로 보잘 것 없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10초 벽을 넘겼다고 자랑하지만 치타에 비하면 그 속도란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초음속기를 만들어낸다. 높이뛰기 기록이 거의 3미터에 근접했다고 자랑하지만 벼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수백 킬로미터를 올라가 우주로 날아가는 인공위성도 띄운다. 60킬로그램 등짐을 지고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은 떵떵거리지만 200킬로그램의 등짐을 지고 사막을 유유히 오고가는 낙타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다. 이처럼 체력으로 견준다면 사람은 참으로 별 볼 일이 없다. 그러나 마음이 내는 힘을 보면 점점 신의 경지를 넘보려고 할 만큼 대단하여 오히려 두렵기까지 한다. 이 같은 마음이 기운이란 강이라는 힘에서 나오지 역이라는 힘에서 나오지 않음을 곰곰이 새겨본다면 왜 자승자강이라 하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려 가늠해볼 수 있게 된다. 노자께서는 자승이라 했지만 공자께서는 극기라고 했다. 다 같이 스스로를 무릅쓴다는 말씀이다. 자승은 자기를 이긴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자승의 승은 승패의 승이 아니다. 두 사람이 씨름하게 되면 하나는 승자가 되고 하나는 패자가 되어 둘로 나뉜다. 그러나 자승에는 이기고 침이 없다. 자승은 자신을 무릅씀인지라 승패처럼 둘로 나누어지는 이기고 짐이 아니다. 자승의 승은 승강-극강의 승인지라 내가 나를 이기는 것밖에 없다는 없음이다. 승강은 극강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자승에는 패자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승자만 나옴이 자승이다. 승인은 내가 남을 이김이다. 여기서 이김이란 체력의 많고 적음에 달린다. 체력이 많은 쪽은 이긴 자가 되어 환호하고 체력이 적은 쪽은 진자가 되어 풀이 죽는다. 씨름판에서 승자는 모래를 한 움큼 쥐어 허공에 뿌리면서 고래고래 호령하며 모래판을 밟지만 패자는 고개를 숙이고 모래판을 떠나니 이기는 쪽과 지는 쪽이 둘로 갈라져 기쁨과 슬픔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자승이란 내가 바로 내 자신을 이김이니 오로지 승자의 희열만 넘침인지라 인생을 진정 즐기고자 한다면 자승하라는 것이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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