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피는 꽃은 예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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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19.11.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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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덕에는 욕심의 뿌리가 내릴 수 없다.(報怨以德 보원이덕이라)

爲無爲 事無事(위무위 사무사)
味無味 大生於小(미무미 대생어소)
多起於少 報怨以德(다기이소 보원이덕)

함에는 욕심내 함이 없고 일에는 꾀하는 일이 없으며 맛에는 더한 맛이 없다. 큼은 작음에서 생기고 많음은 적음에서 일어난다. 원한을 덕으로 써 갚는다.<노자 63장 참조>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 한다. 그냥 두면 괜찮을 것을 공연히 건드려서 안 좋은 일이 생긴다. 이러한 짓은 모두 욕심이라는 것이 꼬드겨 일어난다. 잘되리라 믿었다는 말은 욕심을 내서 부렸다는 말인지라 세상에는 제 욕심대로 되는 일이란 없다고 보아야 마음이 밝아지고 따라서 행동거지가 밝아지는 법이다. 그 법을 자연이라 한다.

밝은 마음이 행동을 물 흐르듯이 함을 자연이라 한다. 자연이라 함은 사람의 욕심이 끼어들지 않음을 말한다. 자연이란 곧 무사욕이다. 진실로 제 욕심 없는 마음으로 행하면 세상이 뿌리치지 않는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안 도니다고 푸념하는 사람은 제 욕심대로 안 됨을 투정하는 짓일 뿐이다. 이런 투정을 일러 인위라 한다. 인위란 돌부리를 제 발로 차는 짓일 뿐이다. 그래서 욕심 부리지 말고 마주하라는 것이다. 욕심 없는 세상을 마주하는 방편이 있다. 위무위 사무사 마무미 등이 그 방편이다. 이 방편을 따르면 누구나 세상의 벗이 되고 덕을 누린다.

위무위는 위무인위의 줄임이다. 행함에 인위가 없다. 인위란 제 욕심대로 함이다. 그러니 위무위라는 말씀은 제 욕심 부리지 않고 뜻을 행하라 함이다. 제 욕심을 부리지 않는 뜻이라면 세상이 서슴없이 받아준다. 그러면 원통하다고 땅을 쳐야 할 리 없다. 제 욕심대로 행하다가 안 되면 세상 탓으로 돌린다면 저에게 쌓이는 것은 원한 밖에 없는 것이다. 제 욕심만 챙기고 행하면 어떤 행위이든지 반드시 저에게 원한이 생긴다.

사무사는 사무사사의 줄임이다. 일함에 사사가 없다. 사사란 나의 쪽에만 이롭게 하는 일을 말한다. 나의 쪽만 이롭다면 남의 쪽은 해롭게 된다. 콘 한 쪽도 나누어 먹어야 성사되는 법이다. 그러니 사무사하는 말씀은 제 욕심 부리지 않고 일해 가라 함이다. 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일이라면 세상이 서슴없이 받아준다. 그러면 일을 망쳤다고 땅을 쳐야 할 리 없다. 제 욕심대로 일하다가 안 되면 세상 탓으로 돌릴수록 저에게 쌓이는 것은 원한 밖에 없는 것이다. 제 욕심만 챙기고 이하면 반드시 저에게 원한이 생긴다.

미무미는 미무사미의 줄임이다. 맛냄에 사미가 없다. 사미란 나만 낼 수 있는 맛을 말한다. 오미를 적당히 섞어 자연에 없는 맛을 만들어내 혀를 홀리게 하는 맛을 사미라 한다. 물맛을 천하일미라 한다. 물맛보다 더 좋은 맛은 없다는 게다. 평생 마셔도 물리지 않는 맛이 곧 물맛이다. 물맛은 왜 물리지 않는가? 물맛에는 무미 즉 맛이 없는 까닭이다. 물에 단맛을 더해 단물을 만들면 한두 번 마시면 그만 물리고 만다. 물에 짠맛을 더해 짠물을 만들면 그 역시 한두 번 마시면 물린다. 그래서 사미는 사미로 그친다는 것이다. 삿된 맛이란 혀를 홀리고 거기 놀아난 혀는 참맛을 잊어버린다. 맹물의 맛을 내치고 사람의 욕심이 만들어낸 사미에 홀리다 보면 제 몸을 제가 병들게 하고 만다. 그러니 미무미라는 말씀 또한 양념 치듯 욕심 부리지 말라 함이다.
욕심 사납게 세상을 마주하지 않으면 원망하거나 원한을 품을 일이란 없다. 원한을 사는 일이란 제 탓이지 세상 탓이 아니다. 세상이 원한을 파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이 나로 하여금 원한을 사게 할 뿐인지라 스스로 산 원한을 갚는 일은 사욕을 버림으로써 이뤄져야 한다. 사욕을 버리면 곧장 그 마음에 덕이 자리 잡는다. 이를 심덕이라 한다. 심덕에는 욕심의 뿌리가 내릴 수 없으니 그 뿌리에서 돋아나는 원한이 돋아날 수가 없어지므로 보원이덕 즉 덕으로 원한을 갚아라 하는 것이다. 

◆성인께는 정해둔  마음이 없다

聖人無常心(성인무상심)
以百姓心爲心(이백성심위심)

성인께는 변함없이 정해둔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으로써 당신의 마음을 삼는다. <노자> 49장 참조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 풀은 바람이 더해지면 반드시 그 바람 따라 쏠리어 따르게 마련이라고 공자는 밝혔다. 그러나 노자는 성인은 백성심 즉 백성의 마음을 따라 당신의 마음을 정한다고 밝혔다. 성인마저도 백성을 따르는데 하물며 군자가 어찌 백성을 따르지 않을 것인가. 그러니 노자의 말씀을 따르면 백성이 바람이 되고 군자는 그 바람을 따르는 풀이 된다. 샛바람이 불면 풀은 서쪽으로 굽히고 하늬바람이 불면 풀은 동쪽으로 굽힌다. 그래서 백성이 동쪽으로 눕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으면 성인은 하늬바람 같은 마음을 내고, 백성이 서쪽으로 눕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으면 성인은 샛바람 같은 마음을 냄이 곧 성인의 무상심이다. 백성이 바라는 대로 뜻을 세우지 자신의 뜻을 내서 백성을 이끌어가려고 꾀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자가 밝히는 성인은 선한 사람은 더욱 선하게 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하게 돌려놓으며 믿음직한 사람은 더욱 믿음직하게 하고 그렇게 못한 사람은 믿음직하게 돌려놓는다. 성인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마음가짐을 능히 간직하고 있는 까닭이다. 성인은 백성을 흠흠하다고 한다. 무엇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을 흠흠이라 한다.

흠흠은 공경하는 마음이다. 무심하게 받드는 마음이 공경이다. 무심은 무욕이라는 말씀이다. 무욕은 무엇을 바라거나 주장함이 없음이다. 자신이 땀 흘린 대로 돌아오는 보람을 만족함이 무욕이라는 무심이다. 한 되어 땀을 흘렸다면 한 되의 보람으로 만족하고 한 말의 땀을 흘렸다면 한 말의 보람으로 만족함이 무욕이다. 만약에 한 되의 땀을 흘려놓고 한 말의 땀을 흘려 한 말의 보람을 거두는 남을 시샘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불행하게 하는 탐욕일 뿐이다. 성인이 흠흠하는 까닭은 조금만큼의 탐욕이라도 물리치기 위함이다. 그래서 성인께서 바라는 바가 따로 없는지라 백성에게 무엇을 내세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무심히 백성을 어루만질 뿐이다. 성인이 흠흠하므로 마치 초목이 햇빛 쪽으로 잎들을 돌리듯이 절로 백성이 성인을 본받게 되는 것이다.

가두리 속에서 때가 되면 뿌려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사는 양어는 인공의 해산물이지 산목숨이라 할 것이 못 된다. 드넓은 바다를 헤매면서 어렵사리 먹이를 스스로 찾아 먹지만 자유롭게 제명대로 살다 갈 수 있어야 자연의 바닷고기로서 산목숨이다. 모든 가축이란 본래는 드넓은 산하에서 먹고 마시고 뒹굴면서 자유로웠던 자연의 산목숨들이다. 그러다가 사람의 손에 잡혀서 먹이는 배불러 얻어먹지만 개는 목줄에 묶어야 하고 소는 코뚜레를 끼고 수천 년 동안 밭갈이에 시달리다가 이제는 울타리 안에 갇혀 한두 해 편안히 사료를 얻어먹던 끝에 육우 꼴이 되어 인간의 식탁에 오르는 살코기가 되고 만다. 이럼 참상은 모두 인위 즉 사람의 짓이 빚어내는 참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의 짓이 사람 아닌 것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인위라는 것이 사람의 코뚜레도 되고 올가미도 되다가 이제는 ‘스트레스’ 맷돌이 되어 쉼 없이 돌아간다. 제 손에 든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깃이 곧 인위라는 사람의 짓이다.

성인은 왜 무상심하는가? 무상심은 요샛말로 무이념이다. 제 주장이념이라는 것은 언제나 인위의 숙주가 되어 사람을 독하게 몰아간다. 이리하여 결국 사람의 짓은 제 발등 찍는 도끼가 되기도 하고 누워 침 뱉는 꼴이 되기도 하며 제 손으로 제 몸뚱이를 묶는 꼴이 되어 버린다. 백성을 배불리 살게 한다면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면서 백성을 후리치고 백성을 평화롭게 보호한다면서 백성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마는 치세라는 것을 돌이켜본다면 왜 노자께서 성인한테는 이념이라는 것이 없다는 ‘성인무상심’이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충분히 살펴 새겨들을 수 있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hadon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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