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 권력과 약속 
[노년의 고동소리] 권력과 약속 
  • 하동뉴스
  • 승인 2020.04.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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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조 즉위년(1392) 7월 17일. 양력으론 8월 13일, 햇볕 따거운 여름 날씨였다. 개성 수창궁에서 나라를 가로챈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용상에 앉았다. 이성계의 혁명에 힘을 보탠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유만수(柳曼殊)·하륜(河崙)·심덕부(沈德符) 등등, 망해 버린 고려 왕조에서 떵떵거리던 대작(大爵)들이 이성계의 등극에 덩실 덩실 춤추며 박수를 보냈다. 며칠 뒤인 9월 28일, 개성 왕륜동에서 이들 공신들은 태조가 만족한 얼굴로 지긋이 내려 보는 앞에서 이방원(李芳遠) 등 태조의 아들들과 함께 대대손손 새로 열린 왕업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맹약의 예’를 가졌다. 그런데 이 자리에 꼭 있어야했을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李芳雨)와 이성계의 첫부인 한씨(韓氏)가 빠졌다. 이방우는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실에서 밀직부사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가 나라를 빼앗으려함을 눈치 채고 황해도 해주 산골에 숨어 버린 양심적 신하라, 이런 자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이성계의 첫 부인 한 씨는 남편이 승승장구할 때 고향 함흥에서 아들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림을 지탱했던 그야말로 조강지처(糟糠之妻)였다. 

 하지만 한 씨는 남편이 개성에서 출세, 왕이 될 때까지는 물론 왕이 된 뒤에도 단 한번 개성에 발걸음을 해보지 못한 평범한 시골 아녀자에 불과했다. 왕이 된 이성계 옆에는 그가 개성에서 정략적 배우자로 삼은 강 씨(康氏)가 어린 두 아들을 끼고 버텨 앉았다. 강 씨는 말엽의 고려 정계를 주름 잡던 신천 강 씨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이었다. 강윤성은 요즘의 경제부총리 쯤 되는 막강한 직위에 앉아, 무예 출중한 이성계를 진즉부터 사위 깜으로 점찍어 뒤를 밀어 주었다. 권력쟁취에 성공한 승자들의 미래 기약(期約) 자리에서, 가장 선임자인 고려 문하좌시중 배극렴이 결의문을 읽었다. 문하좌시중 배극렴 등은 황천후토(皇天后土)와 송악(松岳)·성황(城隍) 등 모든 신령께 고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우리 주상(主上)께서는 하늘의 뜻과 민심의 바램에 따라서 대명(大命)을 받아, 신 등이 몸과 마음을 합해 큰 왕업을 이뤘습니다. 이미 일을 같이 해 한 몸이 되었으니 다행함이 이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처음은 있지만 종말은 있기 드물다’는 옛 사람들의 경계한 바가 있습니다. 무릇 일을 같이한 우리들은 각기 임금을 성심으로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를 다투어 서로 해치지 말며, 이익을 다투어 서로 꺼리지 말며, 타인을 이간(離間)하는 말로 생각을 움직이지 말며, 말과 얼굴빛의 작은 실수로 마음의 의심을 품지 말며, 돌아서서 미워하다가 얼굴을 맞대서는 기뻐하지 말며, 겉으로는 화합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미워하지 말며, 과실이 있으면 바로잡아주고 의심이 있으면 물어 보고, 질병이 있으면 서로 돕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구원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자손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킬 것이니, 혹 변함이 있으면 신(神)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위의 내용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이런 대목은 요즘 세태에 더욱 들어  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익을 다투고 서로 꺼리지 말라. 말과 얼굴빛을 보고 의심하지 말라…”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약속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태조가 왕이 된지 7년, 왕궁을 한양으로 옮긴 2년이 지난 때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공신들의 ‘맹약’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등공신 정도전 일파와 왕후 강 씨가 세자 자리를 강 씨 소생 막내 방석(芳碩)에게 주는 것으로 결정하니 피바람이 일었다. 공신들은 편이 갈라져 강 씨 편에 섰던 정도전?남은?유만수?심효생(沈孝生)?방번(芳蕃)과 방석 형제, 태조의 사위 이제(李濟)와 조카사위 변중량(卞仲良) 등이 참살 당했다. 왕권을 노린 이방원의 칼질이었다. 기가 막힌 태조는 함흥으로 돌아갔다. 권력 앞에 ‘약속’은 햇볕에 사라진 안개와 다름없었다. ㈔대한노인회 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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