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 하동뉴스
  • 승인 2020.06.09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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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 활을 메우듯(基猶張弓與 기유장궁여라)

천지도(天之道) 
基猶張弓與(기유장궁여)

자연의 도 그것은 활을 메움과 같도다 <노자 77장 참조>

장궁하는가? 그러면 곧 도를 따름이라는 게다. 넘치지도 않고 처지지도 않아 그냥 그저 알맞음을 이루어냄을 일러 장궁이라 한다. 그러니 장궁이란 수중이라는 말씀과 같다. 가운데를 지켜라. 여기서 가운데란 산술적인 중간을 말함이 아니다. 길이 10센티미터의 중간은 5센티미터의 점일 터이다. 이런 뜻으로 수중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을 개구쟁이들은 골목에서 함께 놀다가 걸핏하면 싸움질하면서 코피도 흘린다. 코피를 흘리게 한 개구쟁이를 향해 앞으로는 싸우지 마라 부드러운 소리로 타일러주고 코피를 흘리는 제 아들을 집으로 데려가 싸우지 말라고 타이르면서 코피를 닦아주는 어머니는 장궁하는 궁장과 같은 어머니이다. 어린애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는 속담이 있다, 제 어린 것을 두둔하고 남의 어린 것을 헤집으면 두 어른끼리 실랑이가 벌어져 콩팔칠팔 험한 악다구니가 쏟아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불상사는 궁장의 마음가짐을 안다면 생기지 않을 일이다. 활을 메우는 장인은 높은 데를 내려 눌러주고 낮은 데를 치켜올리고 긴 쪽을 줄이고 짧은 쪽을 더해주어 활의 탄력을 알맞게 한다. 고하를 서로 기대게 하고 장단을 서로 아우르게 해주면 너무 약한 탄력이라면 알맞게 살아나고 너무 강한 탄력이라면 알맞게 수그러져 명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싸움질한 개구쟁이 엄마가 남의 개구쟁이한테 꾸지람을 덜고 사랑을 조금 더해주고 제 개구쟁이한테는 사랑을 조금 덜어내 꾸지람을 더해주면 두 집 엄마끼리 정이 두터워져 이웃사촌 삼아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는 일이다. 명궁을 메워내는데 궁장은 수중의 묘를 따르고 중용의 벼리를 따라 가는지 알 만하다. 천지도 즉 자연의 도를 그냥 그대로 본받는 자가 바로 활 메우는 장인이라는 말이다. 자연의 도는 남아나면 그것이 넘쳐나게 버려두지 않고 덜어서 모자라는 것에 더해주어 알맞음을 이룬다. 자연의 도를 따름은 물만 한 것이 없다. 물길은 멈춤 없이 그냥 절로 흘러만 간다. 그런 물길을 자연은 조금도 가로막지 않는다. 태산이 가로막으면 둘러가고 깊은 웅덩이가 있으면 흘러들어 넘쳐나야 비로소 흘러 물길을 허락하는 대로 잡아 흐른다. 자연에는 댐이라는 것이 없다. 흘러가려는 물을 억지로 막아두려는 댐은 사람의 짓일 뿐이다. 자연에는 억지란 없다. 메마른 땅이면 젹셔주고 다 적셔지면 흘러가게 하고 무엇이든 젖으면 낮에 햇빛으로 말려주고 메마른 밤에 이술로 적셔주면서 모든 것을 닦아주고 씻어주면서 온갖 목숨들이 살아가게 해준다. 물 없이 목숨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물은 곧 자연의 현신인 셈이다. 물론 먹을 물이 있고 못 먹을 물이 있다. 이는 물 때문이 아니라. 물속으로 잡것들이 들어가서 일 뿐이다. 자연의 도가 그러하듯 물은 뭇이든 받아들인다. 예전에는 산골이든 들판이든 흐르는 물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그냥 그대로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함부로 물을 마시면 탈이 난다. 물 탓으로 탈이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탓으로 강물에 사는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본래 물이란 실수 무위인데 사람의 짓에 걸려들면서 즉 인위의 것이 되면서부터 독수가 되어 온갖 생명을 해치고 만다. 이런 몹쓸 짓은 자연이 것이 아니다. 오로지 수중 중용의 중을 저버린 사람의 탓이다. 사람의 짓은 늘 제 욕심대로 하고자 온갖 것들을 목축하려고 덤빈다. 따지고 보면 문화니 문명이니 과학 등등이란 목장의 둘레 따라 쳐놓은 철조망 같은 것이다. 철조망 안에 넣어두고 그 무엇이든 쥐락펴락하고자 인간의 성질머리는 늘 끓어 넘친다. 자연은 무엇이든 방목한다. 은하수에는 별들이 방목하고 이 땅덩이에서는 만물이 방목하면서 늘면 줄고 줄면 늘면서 자연은 하나의 명궁을 메운다. 


◆상덕의 베풂으로 내가 산다(上德無而無不爲 상덕무위이불위라)

上德無而無不爲(상덕무위이무불위)
下德爲之而有不爲(하덕위지이유불위)

상덕에는 베풂이 없지만 베풀지 않음이 없고, 하덕은 덕을 베풀지만 베풀지 않음이 있다. <노자 38장 참조>

쥐구멍에도 햇빛이 든다. 햇빛은 자연이 베푸는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료를 댈 수 없다면 전깃불을 켜고 살지 못한다. 전기불의 빛은 인간이 만들어 파는 빛이기 때문이다. 햇빛도 베풂이고 전기불빛도 베풂이다. 다 베풂일지언정 햇빛의 베풂은 하느니 않느니 마느니 등등 이런저런 단서를 붙이지 않는다. 지구가 돌아서 밤이 되면 햇빛은 사라졌다가 어김없이 날이 새면 변함없이 온 곳을 다 그냥 절로 비춰준다. 음지가 있고 양지가 있는 것은 햇빛 탓이 아니다. 햇빛을 막는 그 무엇이 가로놓여 있는 까닭일 뿐이다, 하늘에 구름이 잠깐 그늘지게 한들 구름이 흘러가면 곧장 빛을 내려준다. 이처럼 햇빛은 온 데를 베풀어주되 이러니저러니 어떠한 단서도 없이 그냥 공짜로 비춰 베풀어준다. 햇빛 같은 베풂이 곧 자연의 베풂이다. 이런 자연의 베풂을 일러 상덕이라 한다. 상도의 베풂을 일러 상덕이라 한다. 그래서 상덕을 천덕 즉 자연의 덕이라 한다. 상도의 베풂이 드러난 것들이 삼라만상이다. 인간도 그 베풂의 하나일 뿐이다. 강가의 모래알 역시 그 베풂이고 허공에 날리는 티끌마저도 그 베풂이다. 그러니 어느 것 하나 그 베풂이 아닌 것이란 없다. 특히 온갖 생물이 저마다 삶을 누리다가 마치는 일생 역시 상도의 더없는 베풂이다. 동지시덕이라는 말이 있다. 산천초목의 한해 삶은 동지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시덕이란 덕이 베풀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나뭇가지에 싹이 트면 그 싹이 바로 시덕의 드러남이다. 덕이란 조화를 뜻함이니 변화가 시작됨이 시덕이다. 봄에 꽃피는 조화는 이미 한겨울 동지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이 곧 동지시덕이다. 왜 예부터 성덕재목이라 하였겠는가? 성덕은 나무에 있다는 것이다. 성덕은 덕을 쌓음이다. 덕을 쌓음이란 변화를 그침 없이 이어감이다. 그침 없는 변화의 이어감이 곧 조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화를 일러 성덕이라 하는 것이다. 적도나 극지하면 성덕재목이라는 말씀이 생겨나지 않았을 터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곳인지라 우리에게 성덕재목이라는 말씀이 있게 된 편이다. 나무는 봄 따라 여름 따라 가을 따라 어김없이 한해살이를 쌓아가며 천수를 누린다. 봄이면 싹이 터 잎이 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꽃은 떨어지되 열매가 생겨나고 가을이면 열매가 영글어 그 속에 씨앗을 마련해두는 초목의 여러해살이야말로 성덕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무가 철 따라 보여주는 변화를 곰곰이 새겨보면 <상덕은 무위하되 불위 함이 없다>는 말씀을 누구나 저마다 살펴 새겨서 터득해볼 수 있다. 사람의 짓은 없고 자연의 짓만 있음을 <무위>라 한다. 자연의 짓을 하지 않음이 없음을 거듭 강조해서 밝힘을 일러<무불위>라 한다. 자연의 짓을 하지 않음이 없어 목숨이 있는 것들은 숨을 쉬고 일하면서 먹고 자고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산다는 것은 상덕의 베풂이지 내 스스로 살 수 있다고 건방떨지 말아야 한다. 천 원 주고 산 생수 한 병이 내 것은 아니다. 내 돈 내고 샀으니 내 것이라는 생각은 사람의 짓일 뿐이다. 상덕의 베풂으로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마음이 커진다. 인간의 짓으로 만들어진 것이면 그 무엇이든 대가를 지불하라 한다. 말하자면 인위에는 공짜란 없다. 그래서 인덕은 골고루 베풀어지지 못한다. 왜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겠는가? 왜 고운 놈 미운 놈 따지겠는가? 사람의 짓에는 한결같음이 없는 까닭이다. 변덕스럽게 베푸는 덕을 일러 하덕이라 한다. 하덕을 인덕이라 한다. 인덕은 저한테 좋으면 베풀어지고 싫으면 베풀어지지 않는다. 엿장수 마음대로가 곧 인덕이다. 이런지라 인덕을 일러 <아래 덕> 이라는 게다. 베풀되 무위로 베풀지 못하는 덕인지라 인덕에는 베풀지 않음이 있으니 덕치고는 아랫것이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hadon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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