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 미국을 이겼다!
[노년의 고동소리] 미국을 이겼다!
  • 하동뉴스
  • 승인 2020.07.06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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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년 6월 1일, 건국된 지 90년 남짓한 나라 ‘미국’과 숱한 전쟁을 치른 수 천 년 역사의 나라 ‘조선’이 맞붙어 전쟁을 벌였다. 원인은 5년 전 한강 하류에서 미국 군함 제너럴 슈만호를 조선 군사들이 불태워버린 사건에 대한 미국 측의 사과 요구를 조선이 들어 주지 않음으로 벌어진 무력 충돌이었다. 남북전쟁을 마무리한 미국이 해외에 관심을 두기 시작, 눈에 띈 나라가 조선이었다. 사과 요청을 거절당한 미국은 체면이 구겨졌다. 미국은 마침내 응징에 나섰다.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 공격’에 나섰다. 함대는 함포 78문을 장착한 군함 5척, 사령관은 존 로저스 해군 소장, 병력은 해병대와 해군으로 편성된 1230명, 로저스 제독이 탄 기함(旗艦)은 3480t의 콜로라도함. 일본 나가사끼에서 출발한 함대는 5월 30일 인천 물치도에 정박, 다시 한 번 조선에 사과와 함께 통상을 요구 했다. 

 교섭은 대원군의 어리석은 쇄국 고집으로 말은 없었고, 대답은 소리만 요란한 200여 발의 포격이었다. 미군은 놀라기는 해도 속으로 웃었다. 구식 대포 탄은 폭음은 컸으나 돌멩이에 불과했다. 폭발성이 없는 ‘포알’일 뿐이었다. 선제공격을 감행한 조선군의 전과는 미군 두 명 경상이었다. 공격을 당한 로저스 사령관은 이번에는 포격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들은 체도 안했다. 마침내 미군은 상륙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먼저 함포로 성곽을 부수고 조선 수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투입된 병력은 해병 105명, 해병 육전대 수병 546명, 미군의 시커먼 군함의 함포 사격과 듣도 보도 못한 개인 화력 앞에 조선군은 기겁, 맥없이 무너졌다. 조선군의 개인 화기는 화승총(火繩銃). 불을 붙인 심지를 통해 불기가 총대 안으로 들어가 화약이 터지게 하는 그야말로 웃기는 사냥총이었다. 

 미군은 개전 48시간 만에 조선군 진지를 무혈점령하였다. 조선군의 결사 항전은 미군을 눈물겹게 했다. 미군은 총을 거두었다. 전투 결과 미군은 해군중위 한명과 수병 두 명 전사, 부상 10명이었다. 조선군은 총사령관 어재연(魚在淵) 장군을 비롯한 243명 전사, 포로 20명. 그런데 바다에 흰옷 차림의 시체들이 떠 있고 붉은 핏 띠가 길게 그어진 것으로 봐 350여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군 전사 상에 유례없는 전과를 거둔 미군은 진격을 멈췄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덤비는 조선인들이 너무 많이 죽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하늘이 노할 것 같았다. 힘센 장정과 젖먹이 어린애가 맞붙은 형국의 전투가 정의롭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군들은 죄의식을 느끼기까지 했다. 로저스 함장은 다시 한 번 협상을 하자 했다. 그러나 조선은 뭘 믿는지 거부했다. 미군은 포기하고 퇴각했다. 조선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고 기고만장 했다. ‘척화(斥和)’라는 생소한 글자를 돌에 새겨 세워 더욱 굳게 외부와 담을 쌓았다. 조선군의 유일한 무기는 ‘병정들 목숨’이었다. 병정들이야 얼마가 죽든 조선의 주인인 양반 꼰대들은 알바가 아니었던, 이른바 ‘신미양요’였다.

 그로부터 79년 뒤 미군은 다시 인천에 상륙하였다. 총사령관은 맥아더 장군, 군함 261척, 미 해병대 제1사단, 한국 해병 1개 연대가 투입됐다. 적은 김일성의 북한군, 이번 미군의 목표는 위기의 대한민국 구하기였다. 이리하여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켰다. 한국을 지켜낸 미군의 희생은 너무 컸다. 전투 요원 3만 3629명, 비전투 요원 2만 617명이 죽고, 실종자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10만 3284명이 발생하였다. 전 미국인들이 가장 가슴 아파한 것은 조지 앤드류 데이비스 공군 소령의 전사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266차례 출격, 비행시간 3000시간을 자랑하는 미국의 공중 영웅. 그가 1952년 2월 10일, 한국전이 한창일 때 평안북도 박천 상공에서 중공군에 의해 격추 당해 산화(散華)했다. 충격을 받은 미 공군 사령관이 너무 안타까워 ‘세계최고의 전투기 조종사를 잃었다’는 성명서를 냈고, 뉴욕 타임스는 ‘진주만 사건 이후 가장 어두운 날’이라며 데이비스가 전사한 날을 기록했다.

 미국과 한국이 대원군 시절 통상을 열고 교류했더라면 ‘일제 36년’이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나는 지난해 어느 중학교 학생들 앞에서 3·1운동에 대한 강의를 했다. 서두에 ‘우리나라가 왜 망했는가?’ 물었더니 한 학생이 서슴치 않고 “대원군의 쇄국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자신 만만하게 대답했다. 사)대한노인회 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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