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묵시록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묵시록
  • 하동뉴스
  • 승인 2020.07.0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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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신미균

꽃병 끝에 앉아 있는 파리와
그 파리를 내리치려고
공책을 들고 있는 내가
눈이 마주쳤다

날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리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서로의 속을 알 수 없는
살벌한
한낮

ㅡ시집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파란, 2020)

【시인 소개】
신미균 / 1955년 서울 출생. 199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맨홀과 토마토케첩』 『웃는 나무』 『웃기는 짬뽕』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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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병 끝에 파리가 앉아 있습니다. 그 파리를 죽이려고 나는 공책을 치켜들고 살금살금 다가갑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파리가 꽃병 끝에 앉아 있습니다. 자칫 잘못 내리치면 파리 한 마리 죽이려다 꽃병이 박살날 수도 있습니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파리와 내가 눈이 딱 마주칩니다. 
파리는 “날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는 “내리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둘 사이에 긴장이 흐릅니다. 나에게 파리는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꼭 죽여야 할 이유도 없지만 살려두기도 싫습니다. 하지만 파리에게는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입니다. 서로의 속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잠시 후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살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묵시록(?示錄)”입니다.
이 시를 어찌 ‘파리’ 이야기로만 읽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이지요. 더 구체적으로는 “서로의 속을 알 수 없는”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 한반도의 현실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이 ‘6.25전쟁 70주년’이었네요. 우리에게 언제쯤 ‘평화로운 한낮’이 올까요?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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