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슬픔의 레미콘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슬픔의 레미콘
  • 하동뉴스
  • 승인 2020.09.0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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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레미콘
                                    황인숙


슬픔 반 남은 거 판매함
포장해드립니다

직립원인이 미소 띠고
엉거주춤 팻말을 들고 있다
한들한들 꽃 피운 코스모스들
짚단처럼 쓰러져 있는
지방도로 길섶
막무가내로 바람 불고
온 하늘이 거대한 물고기
비늘 같은 구름으로
촘촘히 덮여 있다

저 하늘 포장(鋪裝)하고
남은 반

-시집『아무 날이나 저녁 때』(현대문학, 2019)

【시인 소개】
황인숙 / 1958년 서울 출생. 1984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아무 날이나 저녁 때』 등이 있음. 동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형평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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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면 패티김이 불러서 히트했던 <구월의 노래>(1967년)가 생각납니다.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은 지고”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구월은 여름과 가을이 섞여 있는 계절이지요. 가로수 잎은 여전히 무성하지만 마음엔 이미 낙엽이 지고, 쓸쓸함과 그리움이 섞여서 감상적인 계절이지요. 길가에 코스모스는 하늘거리고 푸른 하늘은 새털구름이나 비늘구름으로 살짝 가려져서 더욱 은은하지요.
그러나 올해 ‘9월’은 예년의 ‘구월’이 아닙니다. 지독한 장마와 가공할 홍수가 휩쓸어 가고, 혹독한 코로나19가 반년 넘게 뒤덮고 있어서 감상적인 게 아니라 묵시록적입니다. 코스모스는 짚단처럼 쓰러져 있고, 막무가내로 바람은 불고, 하늘은 거대한 불행으로 촘촘히 덮여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을 뒤덮고도 절반이나 남아 있는 슬픔을 포장해서 팔겠다는 이 시는 왠지 엄살 같지가 않습니다. 아예 슬픔을 레미콘으로 ‘공구리’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9호 태풍 ‘마이삭’이 다가오고 있다고, 주의하라는 재난 안내 문자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월을 기다려야 하나 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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