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벌초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벌초
  • 하동뉴스
  • 승인 2020.09.2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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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이재무


무딘 조선낫 들고
엄니 누워계신
종산에 간다
웃자란 머리
손톱 발톱 깎아드리니
엄니, 그놈 참
서러운 서른 넘어서야
철 제법 들었노라고
무덤 옆
갈참나무 시켜
웃음 서너 장
발등에 떨구신다
서산 노을도
비탈의 황토
더욱 붉게 물들이며
오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시고……

-시집 『벌초』(천년의 시작, 2003)
【시인 소개】

이재무 /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실천문학》과 《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섣달 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등 다수.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윤동주시상 등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문창과 대학원 등에서 시창작 강의. 계간 시 전문지 《시작》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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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벌초의 계절입니다. 여름을 지나면서 억새풀과 잡목으로 무성한 산소를 깨끗하게 벌초한 뒤 그 앞에 나란히 서서 절을 올리는 후손들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따뜻하고 흐뭇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벌초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잘 벼린 조선낫 한 자루 들고 아침 일찍 벌초를 나서던 아버지 때의 모습은 이제 없습니다. 
예초기로 하거나, 아예 흩어진 묘소를 한 곳에 모으거나, 그냥 대행업체에 맡기거나 해서 벌초하는 수고를 덜고 있습니다. 우리는 편리함을 위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벌초도 그 중 하나입니다. 벌초에는 귀찮은 노동 이상의 정신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그 가치는 무시되거나 부정되고 말았습니다.
올 가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벌초하는 기회마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벌초도 하지 말고, 추석에도 모이지 말라고 국가가 나서서 만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어려움을 떨치고 일어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격려와 위안마저 나눌 길이 막혀서 더욱 어렵습니다. 조상님들의 음덕마저 받을 길이 없으니 더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뜻이겠지요?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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