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쥐가 달에 걸린 밤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쥐가 달에 걸린 밤
  • 하동뉴스
  • 승인 2020.10.13 0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쥐가 달에 걸린 밤

                                             박구경

모래톱 발목 깊이에서 만난 달이
말없이 차고 이지러져
산중의 부엌 앞 처마 속까지 따라왔으니

필시 사고무친 가난이
먹고 살자고 베어 먹었을 터
아궁이 같은 밥그릇은 더욱 차고
텅 빈 골짜기마다 서늘함이 가득하니
살찐 쥐 그림자만 매끄럽게 잽싸구나

댓잎 후려치는 잔광이 부신
달이 쥐에게 걸려든 밤은
쥐가 달에게 걸려든 밤


-시집 『외딴 저 집은 둥글다』(실천문학사, 2020)


【시인 소개】
박구경 / 1956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제1회 전국 공무원문예대전에 詩 「진료소가 있는 풍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집으로 『진료소가 있는 풍경』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국수를 닮은 이야기』 『외딴 저 집은 둥글다』 등이 있음. 한국작가회의 이사, 경남작가회의 회장 엮임, 고산윤선도문학대상, 경남작가상 등 수상. 

------------------------------------------------------------------------------------------------------------------------------------------------------------------------------------------------------------

어느새 추석이 코앞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달이 살쪄갑니다. 한밤에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여물대로 여물어서 맑고 영롱합니다. 계절은 가을인데 우리의 마음은 벌써 겨울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추석에 덕담이라도 덧붙일 만한 시를 고르다가, 뜬금없이 이 시를 골랐습니다.
이 시는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주린 배를 안고, 어두운 물가를 거닐다가 이지러진 달을 만납니다. 그 달도 허기져서 무언가 얻어먹으려고 산중의 부엌까지 따라옵니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부엌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밥 지은 지도 까마득해서 아궁이도 싸늘하고, 밥그릇도 차디찹니다. 그때 부엌을 가로지르는 살찐 쥐 그림자를 만납니다.
시인은 생각합니다. 필시 저 쥐는 둥근 달을 갉아먹어서 저렇게 살쪘겠구나! 재수 없는 달이 쥐에게 걸려들었다고 여긴 거지요. 올해는 쥐의 해, 우리 모두 휘영청 한가위 보름달이라도 맘껏 뜯어먹고 살찐 쥐가 되어 겨울로 가야겠습니다. 가족들 못 모여서 아쉽긴 하지만 추석(秋夕)이 별겁니까. 그저 가을(秋)의 저녁(夕)일 뿐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