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문화관광스토리텔링]-‘이야기가 있는’하동-
[하동 문화관광스토리텔링]-‘이야기가 있는’하동-
  • 하동뉴스
  • 승인 2020.10.2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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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많은 시인들이 섬진강을 노래하고, 많은 시인들이 ‘아!! 화개’라며, 감동에 겨워했다.
하동은 ‘있는 그대로가 명품’이다. 하동군의 자연과 역사, 신화의 현장은 2000년,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실낱같이 또는 너무도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아직 그대로 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 하동 출신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말이다. 햇볕에 바랜 역사, 달빛에 젖은 신화는 하동 구석구석에서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동군은 한반도의 남단에 있다. 한반도의 봄이 이곳에서 시작돼, 전국에서 손꼽히는 봄 꽃맞이 여행의 1번지이다. 면적 675.5㎢, 인구는 5만여 명, 1읍 12개의 면으로 구성, 방문객은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한다. 타 지역과 도도한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하동은 참으로 특별하다. 자연이 준 ‘축복받은 땅’이다.

한반도의 정기가 모여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지리산(1915m)과 푸른 정맥처럼 흐르는 섬진강, 크고 작은 섬들을 거느린 아름다운 남해바다, 이 세 가지 보물을 다 가지고 있다. 산은 산대로 토끼봉(1733m), 영신봉(1650m), 삼각고지(1586m), 삼신봉(1284m) 형제봉, 벽소령, 영신봉 등 아름답고 신령스런 봉우리들이 꽃잎처럼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 물은 물대로 백운산과 지리산을 좌우로 두고, 남해바다까지 휘돌아 흘러 절경을 낳고 있다.

또 문화역사적으로는 한국 야생차의 태생지이고, 오랜 사찰과 고승들의 흔적, 전설이 감동적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오래 전 섬진강 뱃길을 따라왔고, 걸어 걸어 칠불사를 향해 걸었던 이는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허왕옥이다. 이들이 걸어간 길이 지금의 화개다. 작가 박경리 선생이 눈물을 쏟았다는 악양 평사리 들판, 근현대문학의 큰 산맥을 이루는 소설 ‘토지’, 그 끈끈한 삶의 궤적이 독자의 가슴을 꿰뚫고, 최 참판 댁이란 ‘하드웨어’로 남아 다시 찾아드는 이의 마음을 두드린다.

이인로가 찾지 못한 이상향 ‘청학동’은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를 지나 묵계호수 너머에 있고, 지리산의 품속에서 움찔대다가 찾아온 이에게 ‘옛다, 복 받아라’ 한다. 하동포구 80리, 섬진강 나루터는 영호남을 잇고 중국과 일본 탐라의 돛단배가 어우러진 동양의 로렐라이다. ‘이야기가 있는 하동’은 생각하게 하는 하동을 뜻한다. 머물게 하고, 좀 더 생각하게 하고, 잊을 수 없는 하동의 추억을 주고, ‘감성의 관광’ ‘문화의 관광’을 지향하기 위해 시작된 기획이다. ‘아, 이런 것이 하동이구나’란 또렷한 느낌을 주기 위함이다.

하동군 문화관광 스토리텔링은 13개 읍·면 중 네 곳을 우선 선정하고, 4가지의 주제로 나눴다. 화개와 악양, 섬진강과 청학동이 그것이다. 네 곳은 각각 독립된 주제 속에서, 그곳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정보와 흥미’ 중심으로 전개했다. 이는 이들 지역이 각각 독립된 관광 코스지만  1박 또는 2박 등 여행일정에 따라 유기적인 관광코스가 되게끔 꾸몄다. 또 여행안내자가 각 주제에 따라 가이드 자료용으로 재미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세분화시켰다.

-화개
백두산에서 발원하고, 섬진강을 만나 지리산에서 멎는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서도 꽃이 만개한 곳이 화개다. 화개는 93%가 산이다. 척박한 땅, 먹고 살만한 평지가 없었던 곳이건만 옛적엔 1만8천개의 사찰이 있었다는 전설의 불국토였다. 전설과 유적이 남아, 최치원으로, 장영기란 원조 대도(大盜)로, 쌍계사, 칠불사, 해석이 어려운 각자바위와 같은 흔적을 남기고 후손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멈춰있다. 대비, 침전, 범왕 그 아름다운 마을들을 따라간 수로왕과 허황옥의 흔적이 실낱처럼 밟히고, 돌을 맨 조능선사가 호랑이와 함께 칠불사로 향하는 길은 ‘미치도록 아름답다’고 한 신흥사 옛 절터다. 화개!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이라 해 화개란 지명을 얻은 한국 국토의 역작이다.

경남?전남의 경계, 전라도로 가는 ‘줄배’가 없어진 자리에 단단한 남도대교가 들어섰고, 경상-전라 처녀 총각의 사랑은 덕은리에서 전설로 남았다. 화개천을 따라 오르는 4월, 10리 벚꽃 길은 사랑하는 남녀를 위한 운명의 ‘혼례길’이다. 섬진강과 지리산, 녹차와 벚꽃이 만나는 이곳 화개는 세상 모든 이들이 들러 쉬는 쉼터이기도 했다. 아아!! 화개라고 한 시인의 탄성,

바위를 뚫고 오른 유황 약수터, 풍년을 기원한 정금의 섶다리 매구놀이, 6조 혜능의 머리를 떼러간 귀신도 놀라버릴 삼법의 중국행, 배를 두들기고 꽥꽥 소릴 지르며 지리산을 누빈 대혼자 스님, 무수한 전설과 역사를 가진 쌍계사와 칠불사까지, 화개는 흥미와 전설 그리고 남도 역사의 보고였다. 첨예한 논란에도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인 천년 차나무가 자생하는 곳, 옛적에도 4~50리 조선 최대의 차밭이었던 곳에 초의선사는 동다송을 지어 노래했다. 길마다 달콤한 차 냄새, 지천이 또 녹차 밭이다. 옥보고가 노래 30곡을 짓고, 1000년 왕국 신라의 음악의 발상지가 된 땅이다. 북동쪽은 지리산 천왕봉, 촛대봉과 세석평전 영신봉과 칠성봉 등 1500m가 넘는 지리산 주봉이 화개를 감싸 안고, 36개 마을과 산, 내, 들이 어우러져 최치원의 말대로 ‘항아리 속 별천지’다.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화개에 머물러, 소설 역마를 만들고, 화개장터를 열었다. 산과 강,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삼위일체의 명지, 화개는 ‘역마’의 아름다운 ‘계연의 땅’, 말이 필요 없다. 화개는 꽃이다.

-2000년 전, 김수로 왕과 허황옥이 지났던 칠불사까지의 여정을 따라 간다.
이야기 동선으로는 덕은리(악양정, 대금이들)→화개장터→벚꽃10리길→삼신리(어안동)→침점→정금교(정금섶다리)→대비마을→정금리 통샘→최고수 차나무→화개유황약수터→쌍계.석문바위→쌍계사→불일폭포→맥전마을→화랑수(구름다리)→소년바위→모암(대도 장영기의 마을)→왕성분교→의신(암호문 바위)→범왕마을→칠불사다.

-섬진강을 따라 화개로 가는 길, 길을 잃어버린 나.

두릅회 안주 텁텁한 막걸리 한잔 생각, 섬진강을 따라 악양을 거쳐 화개장터로 간다. 2000년 전, 김수로 왕과 허황옥이 지났던 칠불사까지의 그리움으로 걷는 여정은 아름답다. 그들의 길을 따라 화개를 본다. 세상은 화개를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 화개에 하루를 머문 사람과 머물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한다. 쉬러, 보러, 머무르기 위해 가는 길이다. 길은 벚꽃 80리, 섬진강 600리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화개 10리 벚꽃길이 압도할 아름다움으로 기다리고 있다. 악양면과 화개면의 경계를 따라 섬진강, 화개면 검두 마을, 강 건너편은 전라도 광양시  다압면이다. 오른쪽은 지리산의 중봉 해발 1115m 형제봉이고 그 줄기다. 경상도 사투리로 형님을 부르던 “승님, 성님”이란 소리를 따, ‘성제봉’이라 불리다, 형제봉으로 고쳤다. 봉우리엔 아직도 ‘성제봉(聖帝峰)’이라고 표시돼 있다. 지나는 19번 국도는 본격적인 화개를 보기 위한 숨을 고르는 길이다. 먼저 덕은리로 드는 것은 객의 여유다.

-제자에게 두 번 죽은 정여창, 왕이 술을 주자 “어머니가 마시지 말래서 못 받겠소.”
덕은리 악양정은 비운의 선비 정영창이 3년을 머물러, 흔적이 남은 곳,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슬프다. 악양정은 섬진강을 바라보고 역사의 흐름을 기왓장 아래에 새기고, 섬진강은 비껴가듯 악양정을 바라본다. 앞쪽이 남쪽 같은데, 봄 겨울에 신기하게도 맞은편으로 해가 지는 것으로 보아 그쪽이 서쪽인지, 서남쪽인지 잘 구분이 되질 않는다. 연산군의 스승이지만 연산군에게 두 번 죽은 이가 정여창이다. 슬픔은 그의 아픈 생애에서 나온다. 정여창은 ‘숫자에 밝아 그런지 시문은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이공계 쪽으로 적성이 있었나 보다. 사람을 사귀는 성격은 아니었고, 학문적인 삶을 산 학자풍의 선비였다.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함양 출신이지만 하동군 진교면 안심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하동으로 들어온 이유는 그의 본관이 하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여창은 1490년 쯤 동생과 아내, 자식들을 데리고, 덕은리로 와 3년을 살고, 학동을 모으고 교육을 시켰는데, 이곳이 지금의 ‘악양정’이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였고, 김일손 김굉필 등 쟁쟁한 동문을 둔 ‘사림파’였다. 정여창은 효성이 지극했다. 왕이 술을 내렸다. 정여창이 “저의 어머니가 생전에 술 먹음을 책망한 뒤로 술을 마시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감히 임금의 명을 거역 하나이다”고 했다. 왕은 그를 참다운 유자라 칭송했다. 정여창은 연산군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발발의 이유인 스승 김종직의 글로 인해, 제자인 그는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돼 버린다. 그의 스승은 부관참시, 동문인 김일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애달픈 그의 인생, 귀양지에서 55세에 죽고 만다. 연이은 갑자사화로 아, 불쌍해라. 올곧은 정여창은 끝내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제자 연산군에게 1번 유배돼 정치적 사형을 받아 그곳에서 죽고, 또 한 번은 무덤까지 파헤쳐져 두 번의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안락정(顔樂井)이란 샘물은 악양정 아래에 있었다. 맛이 정말 끝내 줬다고 한다. 지금 ‘안락정’ 복원을 말하고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풍년이 들면 신기하게도 이 샘에는 풍년초가 난다고 한다. 1994년 악양정을 보수하면서 이 멋진 샘물인 안락정은 메워져버렸다.

-유교 성현들과 함께 지금은 제사를 받는 몸

정여창은 사후 중종에 의해 우의정에 추정되고, 문헌공이란 시호를 받고, 우리나라 큰선비들과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 모셔졌다. 사면 복권된 거였다. 요즘말로 명예회복을 한 거였다. 덕은리 상덕마을에 주자와 정여창 선생 등 5명의 선현을 모시고 있고, 덕은리 덕은사에도 최치원과 함께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4월15일 지역의 유림이 이곳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지지고 볶아도, 헤어지려 작정을 해도, ‘대금이들’에선 사랑이 이뤄진다는데…. 
악양정에서 동남쪽으로 보이는 들이 ‘대금이들’, 지금은 도로로 막혀, 대금이들은 동강나 있다. 강부분과 들로 나뉘어져 있다. 이 대금이들에서나, 악양정 근처에 머무는 사람마다 홀린 듯 ‘멍하니’ 건너 전라도 쪽 광양시 다압면 염창나루를 우두커니 바라본다고 하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언제 들어도 설레는 처녀 총각의 이야기가 이곳에 있다. 어느 7월 보름에,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 총각은 대금피리를 불었고, 건너편 전라도 처녀는 판소리로 노래했다는 청춘남녀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약간 각색했다.)

둘은 “판소리로 득음을 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대금피리의 악장이 되는 날 만나자” “그해 7월 보름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5년이 지나고, 총각은 먼저 조선 최고의 ‘대금악장’이 돼 그해 7월 보름에 섬진강을 찾는다. 하지만 처녀는 오지 않고, 매년 총각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처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처녀는 약속한 날에 섬진강에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득음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할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수년을 그렇게 연습했지만, 득음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처녀는 “한이 쌓여야 득음을 할 수 있다”는 스승의 이야길 듣는다. 5년이 6년 되고, 6년이 7년 됐다. 헤어지고 벌써 10년, 그해 7월 보름엔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하동 대금이들에 대금을 든 총각은 다시 돌아왔고, 같은 자리에 앉아 또다시 처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단박에 전화를 할 건데…. 총각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고, 비를 맞으며 들 모퉁이에 앉아 건너편을 바라보다 비 그친 새벽에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총각이 멀어져 갈 때 총각을 보고 있던 처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총각을 불렀다. 
“자기~이~” 한이 맺혀 울음이 터졌는데, 울음이 아니라 노래로 터져 나왔다. 슬플 때 우리 조상들이 눈물대신 ‘아이고’ 하고 곡을 하는 것처럼, ‘울부짖음이 터져 노래로 나왔다.’ “갈까부다 갈까부다 님따라서 갈까부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고….” “…떼 지어 날아가는 청천의 기러기도….(춘향가)” ‘한과 애절함이 삭아 노래로 불린 서편제 판소리는, 결국 처녀의 목을 틔어 버렸고, 순간 처녀는 득음해 버렸다. 돌아가던 총각은 돌아보았고,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지만 총각은 처녀의 소리에 맞춰 대금 반주를 하기 시작했다. ‘어허라 디야’ 덩실덩실 춤을 췄고, 또 피리를 불어댔다. 마을 사람들은 총각이 앉아 기다린 곳을 ‘대금이 들’이라 불렀고, 건너편 처녀가 노래를 부른 곳을 ‘연창’으로 부르다가, 소금배가 드나든다고 해 ‘염창’으로 바뀌었다.
 
1913년, 신작로가 뚫리면서 대금 이들은 강과 분리돼 버렸다. 여기서 섬진강가로 내려가는 길은 위험하고, 마땅치가 않다. 악양정이나 근처에서 건너편 강가를 바라보는 방법이 제일 낫다. 처녀가 있던 다압 쪽은 물이 깊고, 총각이 있던 곳은 모래밭이다. 모래밭에서 보면 건너편은 바로 앞처럼 보인다. 다압 쪽 강변 대나무는 정말 여유롭게 흔들린다. 5년을 짝사랑한 부산남자가 이곳에서 청혼을 했다는 이야기, 첫사랑이 이뤄졌다는 진주 아가씨 이야기, 광양 부부가 이혼 수속까지 끝내고 이곳에서 다시 재결합했다는 이야기, 대금이 들에서, 부른 사랑의 피리는 아직도 남아, 사랑을 이뤄주는 ‘기운’으로 남아 있음이다. 글/하동군·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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