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 옥종 중학생
[노년의 고동소리] 옥종 중학생
  • 하동뉴스
  • 승인 2020.11.10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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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군청에서 일할 때였다. 업무와 관련하여 알게 된 읍·면 소속 선배 공무원 한 분을 깊이 새겼다. 그는 지리산 빨찌산 출신이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마을에 잠입한 공비에게 끌려가 빨찌산이 됐었다 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참으로 드라마 틱 했다. 부산에 계시는 외삼촌이 운동화를 사주셨는데 신고 다니기가 아까워 운동화를 손에 들고 다녔다. 어느 날 친구에게서 빌린 책을 되돌려 주고 돌아오다가 골목길에서 마을에 잠입한 지리산 공비를 만났다. 공비는 손에 든 운동화를 빼앗아 갔다. 안된다고 징징거리며 공비를 따라 얼마쯤 갔는데, 공비가 한술 더 떠 쌀 포대를 맡기며 “이걸 메고 저기 고개까지만 가면 운동화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는 공비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무거운 쌀 포대를 메고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고갯마루에 닿았다. 고개에는 공비 패거리들이 떼를 이뤄 탈취한 옷가지 뭉치와 식량 포대들을 즐비하게 늘려 놓고 패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화를 되돌려 주고 보내 준다는 공비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리하여 팔자에 없는 빨찌산이 되고 말았는데, 소년에게는 총도 주지 않고 밥 짓고 빨래하는 일만 시켰다. 나는 기막힌 그의 과거에 흥미를 느껴 “지리산 빨찌산 총수 이현상(李鉉相)을 본 일이 있느냐?” 고 물었다. 그는 “딱 한번 봤다!”고 했다. 그가 산으로 끌려 온 그해 가을, 멀리 보이는 들판은 벼가 누렇고 감나무에 달린 붉은 감들이 눈길을 끌던 가을 어느 날, 산청 거림골 뒷산 양지 쪽 오래된 무덤의 약간 넓직한 묏자리에 일행 빨찌산들이 모였다. ‘진중 재판’을 한다했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웅성거리는 가운데 자기 동년배의 한 막깍이 소년이 끌려 나와 소나무 둥치에 묶여 세워지는 것이었다. 그 소년은 거림골에서 개울을 따라 덕산 쪽으로 도망 가다가 초병에게 붙잡혀 끌려온 것이었다. 대장(隊長)인 듯한 빨찌산이 소년에게 “왜 도망치려 했느냐?”고 다그쳤다. 소년은 “제가 산으로 올 때 어머니께서 몸이 아파 누워 계셨기에 한번 뵙고 오려고 내려가던 참이었습니다!”. 추궁하던 빨찌산은 “이 간나 새끼 사상 무장이 덜 됐구만!”하더니 “여러분! 이 놈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하고 좌중에 외쳤다. 여기저기서 “죽여라!”하는 고함 소리가 났다. 그러자 한 소년이 손을 번쩍 들더니,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제가 저 동무와 옥종 중학교에 같이 다니는 한 동네 친군데, 저 동무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 지낸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고함이 터졌다. “저놈도 끌어내 죽여라! 우리 사업에 장애가 될 뿐이다!” 결국 만장일치로 두 중학생을 ‘죽여야 한다’는 것으로 결정됐다. ‘한번만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소년도 끌려 나와 소나무에 나란히 묶여 세워졌다. 총소리가 나면 문제가 되니까 조용하게 처리해야 했다. 한 소년에게 빨찌산 셋씩 달려들었다. 그들은 사형 집행자의 구령에 따라 총검으로 소년들을 마구 잡이로 찔러댔다. 소년들은 “엄마 아?!”하는 외침과 함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참극이 벌어진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위쪽에 여자 빨찌산을 옆에 끼고 앉아 가만히 내려다보는 늠름한 풍채의 중년 사내가 보였다. 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두 소년의 목이 늘어지는 것을 보고는 묵묵히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가 바로 이현상이었다. 해가 기우는 가을날 오후, 까마귀 울부짖음이 산골에 메아리 쳤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멀리 보이는 마을들은 참으로 평화스러워 보였다. 국군 토벌대에게 사로 잡혀 광주 수용소를 거쳐 살아 돌아 왔었다는 선배 공직자는 살면서 자식을 키워 보니 그때 거림골에서 야수 같은 빨찌산들 총검에 목숨을 앗겨 버린 두 옥종 중학생의 비참한 죽음이 점점 뚜렷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했다. (사)대한노인회 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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