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편지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편지
  • 하동뉴스
  • 승인 2020.11.24 1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지
                            김정석


광양주유소 휘발유 판매기 앞에
가을이 와서 멈췄다

성냥을 그어달라고

단풍나무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주유기를 꺼내어 갈긴다
초조한 사랑아

뼈가 붉게
익어간다
단풍잎도 온통 피칠갑이다

살점 뭉텅뭉텅 베어내듯 노을이 온다

불 질러달라고

-시집 『내가 나를 노려보는 동안』(천년의시작, 2020)

【시인 소개】
김정석 / 전남 해남 출생. 2004년 《모던포엠》으로 등단. 시집 『별빛 체인점』 『내가 나를 노려보는 동안』이 있음. 현재 광양제철 근무.

-------------------------------------------------------------------------------------------------------------------------------------------------------------------------------------------------------------

거대한 산불처럼 온 산하가 붉게 물들고 있습니다. 아무리 ‘코로나 구금시대’라고 해도 주유소로 달려가서 ‘만땅’으로 기름을 채워야 할 것만 같습니다. 주유기 끝에 성냥을 그어대고 사방으로 휘갈기며, 불나방처럼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지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이렇듯 설레고 초조하고 안달하는 계절이면서,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허무하고 차분해지는 계절입니다. 조울증을 앓는 사람처럼 양극단을 오르내리는 감정의 기복으로 우리는 힘이 듭니다. 조락하는 계절의 화려함과 변화 없는 일상의 초라함 사이에서, 한해가 저문다는 다급함과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초조함 사이에서 우리의 마음은 안녕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올해는 이렇게 저물어갈 것입니다. 9회말 투 아웃에서 역전의 홈런포는 기어이 터지지 않을 것입니다. 불타는 저 가을은 잿빛이 되어서 겨울로 갈 것이고, 우리는 주유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차를 돌려서 집으로 가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다 압니다. 여기가 게임의 끝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뭘 해야 하는지도 우리는 잘 압니다. 잘 알기 때문에 재미는 없지만, 잘 알기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