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하동군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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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20.12.1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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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시라 침점 가서, 둘이서 옷고름 푼다코!?”
 김해를 출발해 남해와 섬진강을 따라 뱃길 150리, 김수로 왕과 허황옥은 칠불사에서 성불한 7왕자를 보기 위해 화개에 들어섰다. 왕의 행차는 처음으로, 화개 대비마을에서 머물었고, 침전마을을 거쳐 칠불사로 갔다. 대비마을은 왕비가 머문 곳이라 해 ‘대비마을’이란 이름을 얻었고, 침전 마을은 여행 중 김수로 왕의 옷고름이 떨어져, 바느질을 시키면서 쉰 곳이라 해 침전이라 불렀다. 원래는 ‘바늘 점’마을이었다. 지금의 주민들은 이곳을 삼태동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모양이 삼태기처럼 생겨 삼태동이라 하는데 삼태기는 풍수에서 차면 비워야하므로, 부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 ‘다 떨어진 삼태동’이라고도 부른다. 다소 무시하는 것 같은 말이지만 ‘다 떨어진 삼태동’은 ‘부’를 상징하는 칭찬이지 욕이 아니다. ‘늘 삼태기를 채우시고 부자 되시라’는 말이다. 또 침점에서 보는 삼태성이 그리 아름답고 밝고 맑아서 ‘삼태동’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삼태성이란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에서 물을 담는 쪽의 길고 비스듬하게 늘어선 세 쌍의 별을 말한다. 일곱별 중 가장 밝은 상중하의 별이다. 큰곰자리의 발바닥 부근에 해당한다. 어느 날, 화개장에서 눈 맞은 청춘남녀가 슬쩍 자리를 뜨다 들켰다.
“둘이 오데 가는데?”
“침점에 삼태성 보러 안가나!”
“오데 간다코?”
“왕이 옷고름 떨어졌다고 꿰멘 데 그 간다.”
“뭐시라 둘이서 옷고름 푼다코!?”
 깜짝 놀라며.
“아이고, 다 떨어진 삼태동 간다. 묻지 마라 마.” 

-가락 왕 부부의 행차로를 따라, 60년대 사라진 섶다리를 건너고 싶지만…. 
[정금 섶 다리] 60년대까지 정금리 화개천엔 ‘섶 다리’가 있었다. 화개에서 40년 이상 산 사람들은 섶 다리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2~3m 정도로 높았고, 8~9월에 큰물이 지나고 나면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큰 나무로 기둥을 줄줄이 잇고, 생솔가지나 잎나무를 얹고 흙을 얹었다. 다리를 완성하면 다리 다지기를 위해 꽹과리와 장고를 두들기며, 매구를 쳤다고 했다. 다리를 다짐과 동시에 동네축제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넓이는 2m정도였다. 위치는 지금의 정금교 바로 아래였다. 가장 화개다운 풍경이 이곳 정금리 섶 다리이었건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섶 다리가 홍수나 장마에 자연적으로 떠내려가면, 풍년을 기원하며 9월께 마을사람들이 모여 다시 짓고, 이듬해 떠내려가면 또 다시 짓고…. 이 섶 다리는 어쩌면 대비마을에 먼저 머물고 침전으로 가 칠불사로 향하던 김수로 왕 부부가 지났던 그 다리길인지도 모른다. 맞다면 이 섶 다리는 화개벚꽃10일 혼례 길과 이어져 오래 헤어진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부부가 함께 걷는 동반자의 길이다. 정금리 대비마을에서 침전마을로 가는 수로 왕과 허황옥의 행차로는  왕의 차가 나오는 곳에 왕이 지났던, 왕의 길이고, 왕의 다리다.

※섶 다리 =섶 다리는 추수철에 만들었다가 다음해 장마철에 자연스럽게 떠내려가도록 만든 임시 다리다. 섶이란 땔나무를 말하는데, 생나무나 마른나무나 땔감으로 쓸 수 있는 나무를 이른다. 유명한 섶 다리는 강원도 영월에 있다. 강원관찰사가 단종의 능이 있는 영월의 장릉을 참배하기 위해선 주천강을 건너야 했는데 주민들이 섶으로 다리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오늘날 재현돼 테마관광으로, 또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인기가 높다.

-보름엔 화개에 하루 자는 것이 예의다
정금리 10리 벚꽃 길에서 형제봉으로 떠오르는 달은 화개가 주는 별미다. 주렁주렁 이어진 지리산 능선에서, 사계절 내내 둥둥 떠오르면서 위치까지 바꿔주는 보름달, 보름마다 둥글둥글, 그믐마다 반달이다. 특히 겨울 보름달은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준다. 보름엔 화개에서 하루 자는 것이 예의다. 보름달을 보라. 아침이면, 달빛에 어린 정금리, 동틀 무렵 이 일대의 차밭은 ‘아아, 화개’란 말이 터져 나오고도 남는다. 낮과 달뜬 밤이 다르고, 벚꽃과 어우러진 차밭의 봄과 산내들이 모두 푸른 여름이 다르다. 이슬 머금은 차밭, 저물 때의 영롱함, 차밭은 볼 때마다 계절마다 시간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혼자 있을 때 다르고, 둘이 있을 때가 다르고, 사랑을 고백한 뒤, 다가오는 마음이 이전과 같지 않다. 떼 지어 있을 땐 더 좋다. 

-허황옥의 그리움이 남아, 대비마을은 전설을 품었고
[대비마을] 가야의 수로 왕과 허황옥이 2000년 전 이곳 정금리를 지나 칠불사에서 성불한 7왕자를 보러가는 길에 들려 쉰 곳이 대비마을이다. 가파른 산 위에 차와 차밭, 마을과 산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건너는 삼신마을이다. “쉬었다 가자.” 대비가 쉬었다고 해서, 마을이름은 ‘대비’가 됐다. 그리고 이곳에 절이 섰고, 이름은 천비사(또는 대비사)였다. 시간이 지나 절은 폐사되고, 대비사 흔적이 있던 곳에 칠불사 서봉스님이 옛 절터를 찾아 최근 작은 절을 지었다. 지금의 ‘대비암’이다.

-최치원이 마신 우물은 ‘통 샘’, 가야금을 연주했으니 원래 ‘탄금’이 그 이름이다
[정금 통샘]통 샘은 정금리에 있다. 쌍계사와 칠불사로 가는 화개동 순환 2차선 도로 가에 있다. 최치원 마신 우물로 알려져 있다. 세이암에서 귀를 씻고, 지팡이를 던지고, 청학동으로 들어갔다. 통 샘의 주위가 모두 녹차 밭이다. 통 샘을 등지고 왼쪽은 백운산, 오른쪽은 지리산 준령이 멀리서 빡빡하게 바라본다. 통 샘은 참 샘으로 불렸고, 정금리 주민들이 모두 마셨던 샘이지만 상수도 가설이후 사용치 않는다. 지금의 도로보다 약 2m정도 낮은 곳에 샘이 있었고, 화개 천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 길가다 녹차 밭을 보기 위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금리는 최치원과 얽힌 이야기가 하나 더 전한다. 바로 정금리의 유래다. 최치원은 거문고를 잘 탔는데 달 밝은 밤이면 이곳에 머물며 가야금을 연주하곤 했다. 달빛과 가야금…. 마을 사람들이 그 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은지 최치원에게 더 머물러라 했고, 최치원도 또 그곳에 머물렀다. 최치원의 가야금을 들은 뒤부터 마을은 ‘정(停, 머무를 정) 금(琴, 거문고 금)’이 됐다. 즉 최치원이 머물며 가야금을 탄 곳이란 뜻이다. 원래지명은 탄금(彈琴)인데, 이름이 바뀌어 지금의 정금(井琴)으로 바뀌었다. 최치원이 가야금을 탄 곳의 위치는 모른다. 확실한 건, 사람들 눈에 잘 띄고, 소리가 잘 퍼지는 곳, 달빛 제대로 어리는 곳이다.

-북풍, 찬 서리, 1000년 세월을 이기고 자연이 살린 위대한 천년의 차나무 
[최고수 차나무] 화개 정금리 2차선도로에서 동쪽 형제봉 방향 약 1㎞, 지천이 차밭인 도심마을 도로를 지나 1000년 차나무를 찾는다. 그 맛이 달고, 쓴맛이 받히지 않는 맛…. 1000년 차나무는 천년의 차 맛을 선사한다. 키가 클수록 단맛으로 찻물로 우려지며,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대접된다. 2006년 11회 하동야생차축제에서 한 줌 정도인 100g(우전 차)이 1천300만 원에 경매로 낙찰되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만들어낸, 한국 차의 역사를 새로 쓴 나무이기도 하다. 한국차문화연구회는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 야생차를 조사한 뒤 이곳 ‘정금리 도심 마을’에 있는 이 나무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된 차나무’로 결론 내렸다. 한국양명학회는 이 차나무의 수령을 1000년으로 보았다. 화개 쌍계사 인근이 한국 차나무가 처음 심어진 시배지이니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던 나무였다. 1000년을 살아남은 차나무, 차나무는 나이테가 없는 늘 푸른 나무다. 1000년 차나무가 있는 곳은 지리산 준령 형제봉 기슭의 가파른 급경사지다. 정금리 도심마을에서 7대째 오 씨 가문의 오시영 씨 개인 소유다. 특성상 그리 크게 자라지 않는다. 느티나무와 같은 거대 고목을 생각하고 1000년 차나무를 본다면 실망하기 쉽다. 어른 허벅지만한 굵기로 키가 4.2m, 둘레가 57cm다. 이 땅에서 1000년을 살아온 ‘왕의 차나무’는 지형이 살린 자연의 특혜였다. 형제봉이 두어 번 감싼 곳에 위치해, 북쪽의 지리산 겨울 찬바람을 막아내고, 찬 골바람은 이곳을 비켜, 형제봉으로 지나친다. 
남향은 한 겨울에도 햇볕을 잡아두면서 1000년을 냉해로부터 지켜냈다. 원래 이곳은 대나무 숲 야생차나무 군락지였다. 대숲이 먼저 서릿발과 눈, 북풍을 먼저 받아냈던 것이다. 이 나무의 뿌리부분에는 원가지가 썩어, 다시 줄기가 자란 것임을 확인할 수 있고 지금의 줄기가 원가지처럼 보이지만 원가지는 아니다. 애석하게도 이보다 더 큰 나무가 있었는데 차문화연구회가 연도측정을 위해 잘라갔다고 한다. 차나무는 추위에 강한 품종이라도 영하 15℃로 1시간 정도 계속되면 말라죽는다. 이런 악천후를 1000년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게 이 차나무다. 같은 화개의 야생차지만 이 나무는 1~2개월 이상 먼저 꽃이 핀다 해서 전국 어디를 돌아도 이 보다 오랜 차나무는 찾을 수 없다. 집지을 때 ‘남향, 남향’하는 것도 어쩌면 다 이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명물을 몰라서, 베어버린 차나무가 수 십 그루, 남은 것이 지금의 1000년 차나무 한 그루다. 경상남도 지정기념물 264호다.

-차는 세계 어디서든 “차(Cha)”와 “티이(Tea)”로 발음
[차의 기원] 전 세계 어디서든 차는 ‘차(Cha)’와 ‘티이(Tea)’로 발음한다. 아시아를 비롯해 아메리카와 중동, 아프리카까지 그렇다. 어디를 가도, “차!” “티이!”하면 알아듣는다. 세계학계는 중국이 원산지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기록된 가장 오래된 사료는 중국 한나라 때 사천성의 성도 근방에 노예매매증서에 적힌 글이다. 이 서류엔 노예에게 시킬 것을 썼는데 이중 ‘차를 사온다’는 글귀가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약 2000년 전부터 차를 마셨을 것이란 가설이 성립하는 셈이다. 설화로는 중국 3황 오제 때 신농씨가 약초를 연구하던 독초를 먹었는데 차를 마시고 해독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설화에 따르면 약 5000년 전쯤으로 이해된다. 670년대 쯤 쓰인 당나라 육우가 쓴 ‘다경’이 있고, 이때쯤 차가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차나무는 기원전 2700여년, 약 5000년 전부터 이용된 기호음료다. 커피 코코아와 함께 세계 3대 비 알코올성 음료다.

-551년 진흥 왕이 헌 다례를 올리고, 828년 대렴이 차를 가져와 심는데….
551년 삼국사기에 진흥 왕이 헌 다례(獻茶禮)를 올렸다. 차례를 지냈다는 뜻이다. 제사의 원이름이 차례다. 과연 언제부터 차를 마셨을까. 진흥 왕 헌 다례 이전, 우리나라의 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539년 ‘일본서기’에 있다. 백제성왕이 승려 담혜를 일본에 보내 흠명천황에게 ‘불구와 다기’를 보냈다는 기록이다. 서기 500년대 이전부터 차가 있었다는 문헌상, 역사적인 증거다. ‘삼국사기, 551년’에 신라 진흥 왕이 전몰장병을 위한 팔관연회에서 ‘헌 다례’를 올렸다. ‘삼국사기 가락국기, 632년’ 가락국 2대 거등 왕이 수로 왕과 허황후에게 제사를 지낼 때 차와 떡과 다과를 올렸다. 646년 신라 선덕 왕 때 음다풍속이 성했다. ‘동대사 요록, 668년’에 백제 승려 ‘행기’가 일본 나라 동대사란 절에 차나무를 심었다. ‘삼국사기, 741년’ 충담사(忠談師)가 경덕 왕에게 전다(煎茶)를 올렸다. ‘삼국사기, 828년’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와 왕명에 따라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828년의 기록은 일본서기보다 289년, 삼국사기에 나타난 최초의 차에 대한 기록인 진흥 왕 헌 다례보다 277년이 늦었지만,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차가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유래설, 우리나라에 원래부터 차나무가 있었다는 자생설, 가야국 허황옥에 의해 차가 들어왔다는 해양설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뿌리는 아래로 깊이, 열매와 꽃이 서로 만나는 신비의 나무가 차나무다
[설화상봉수] 국제적으로 차나무는 동백나무의 형제 간 정도로 본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재배되는 차나무는 잎이 작은 소엽종으로 2~3m 높이까지 큰다. 히말라야와 방글라데시 사이쯤에 있는 인도 아삼지방의 차나무는 잎이 큰 대엽종으로 키가 15m까지 자란다. 아삼지방은 세계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소엽종의 뿌리는 2~4m까지 아래로 뻗어 있다. 거구 최홍만 키의 2배정도까지 아래로 폭삭 빠지듯이 뻗어 버린다. 속 뿌리는 15~20cm정도로 조금 벌어지고,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리는 모양이다. 잎 모양은 소엽종이 그렇듯 달걀모양이고, 톱니처럼 뾰족뾰족한 잎이 나 있다. 중국 운남성에 1200년 됐다는 차나무가 있다. 굉장히 큰데 어른 2명이 안을 정도다. 10월~11월에 흰색이나 연분홍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데 어른 새끼손톱 크기다. 동글동글하고 익으면 터져 싹이 나온다. 옮겨심기를 할 때 뿌리를 잘못 건드리면 살아남기 어렵다. 최근엔 관상용으로 인기를 끈다.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고도 하는데, 열매와 꽃이 서로 만나는 나무라는 뜻이다. 식물은 대부분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다. 녹차는 꽃이 피고 1년이 지난 뒤 열매를 맺는 특징 때문에 전생의 인연, 아버지와 아들, 가족 간의 화합, 군신과의 관계로 비유되곤 했다. 명절 때 지내는 ‘차례(茶禮)’도 차를 올린다는 뜻이다. 글/하동군·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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