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가을비 오는 밤엔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가을비 오는 밤엔
  • 하동뉴스
  • 승인 2020.12.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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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오는 밤엔
                                             이해리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어떤 가지런함이여
산만했던 내 생을 빗질하러 오라
젖은 낙엽 하나 어두운 유리창에 붙어
떨고 있다
가을비가 아니라면 누가
불행도 아름답다는 걸 알게 할까
불행도 행복만큼 깊이 젖어
당신을 그립게 할까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사화집 『입김이 닿는 거리』(북인, 2020)

【시인 소개】
이해리 / 경북 칠곡 출생. 2003년 제3회 평사리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 시집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 『감잎에 쓰다』 『미니멀 라이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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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은 깊어 가는데 비가 조곤조곤 낙엽 위로 내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귀를 빗소리 쪽으로 열어둡니다. 헝클어진 생각들이 가지런해지는 느낌입니다. 문득 바라본 유리창에 젖은 낙엽 하나가 달라붙어 찬비에 떨고 있습니다. 불현듯 춥고 힘들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가을비가 아니라면 누가 불행도 아름답다는 걸 알게 할까요. 불행도 행복만큼 깊이 젖어 그립게 할까요.
그러고 보니 가을비는 참 소중한 것들을 일깨워 주네요. 불행이 아름답다는 것. 불행도 행복만큼 그립다는 것.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인간에게는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불행할 수 있는 권리도 있지요. 이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불행을 예찬하는 건 아닙니다. 불행이란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지요. 하지만 행복을 좇기만 한다고 얻는 게 아니듯이, 불행을 피한다고 해서 비껴가지도 않습니다. 그저 가을비 오는 밤에 아프도록 그 불행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지금은 그 불행으로부터 멀찍이 벗어났다는 걸 확인할 뿐이지요.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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