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뉴스가 권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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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20.12.29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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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싣는 순서 
제3장 경솔하면 곧장 뿌리를 잃는다

생명과 재물에서 어느 것이 중대하냐(身與貨孰多 신여화숙다라)

名與身孰親(명여신숙천) 
身與貨孰多(신여화숙다) 

명성과 생명에서 어느 것이 소중하냐? 생명과 재물에서 어느 것이 중대하냐? <노자 44장 참조>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 돈이 있으면 세상을 얻고 없으면 집에 있던 개도 나간다. 옛날은 저 사람 돈 없이 살 사람이라고 하면 칭찬하는 소리였지만 지금은 능력이 없어 등신 같은 놈이라는 욕이 된다. 법치의 세상이라고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돈이 법보다 힘이 더 센 것 같기도 하다. 오죽하면 유전무죄이고 무전유죄라는 넋두리가 생겼겠는가. 돈이 있으면 범한 죄도 지워지고 돈이 없으면 없는 죄도 생긴다는 속어가 인간은 존엄하다는 생각을 비웃는다.
생명과 재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하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더 생명이 더 중하다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그런데 목숨보다 돈이 중하다고 판단해야 하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빚어진다. 이런 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옛날이야기로 흑두 백두 두 산적 이야기가 있다.
흑두는 북쪽 골짜기를 맡고 백두는 남쪽 골짜기를 맡아 재를 넘는 사람들의 재물을 털었다. 남쪽 백도가 한몫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 흑두가 백두를 찾아왔다. 그런데 백두가 깊은 샘을 내려다보면서 한숨만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흑두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거기 앉아 있는 아낙이 이 우물에다 쥐고 있었던 값비싼 진주 가락지와 온갖 폐물을 놓쳐 날더러 건져주면 절반을 준다고 하니 우물로 들어가고 싶은데 워낙 깊어 보여 망설이고 있는 중일세. 흑두가 우물을 들여다보니 깊이는 깊지만 두레박줄을 이용하면 되지 않겠는가. 내가 두레박줄을 타고 내려가 건져 올 테니 자네는 저 아낙을 쫓아버리거나 없애버리고 우리 둘이 반씩 나누세. 그러세. 흑두가 옷을 홀랑 벗고서는 두레박줄을 잡고 우물 담벼락을 타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풍덩 소리를 듣자마자 백두가 우물 천정에 매달린 두레박줄을 잘라 우물 속으로 던져버리고 흑두의 옷을 모조리 들고 저 아낙이라던 제 아내와 함께 줄행랑을 쳐버렸다. 깊은 우물 속에 빠진 흑두가 아무리 소리친들 소용없었고 발버둥만 치다가 그만 수장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옛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은 돈 되는 것 앞에서는 사족을 못 썼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따지고 보면 돈 때문에 목숨을 앗아가는 덫에 걸려 제명대로 못 살고 말아버리는 경우가 여기저기 벌어지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왜 세상에는 사기꾼이 사라지지 않는가? 사기를 치면 그 사기를 당해주는 바보가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의 말솜씨란 생쥐를 끌어들이는 꿀단지 같은지라 그 꿀맛에 홀딱해 꿀단지 속에 빠져버린 생쥐 꼴을 당하고 땅을 쳐본들 제 손바닥만 아플 뿐이다. 따지고 보면 사기 치는 놈이나 사기를 당하는 바보나 다 같이 재물에 눈독이 들어서이다. 사기꾼은 제 치 혓바닥으로 남의 돈을 긁어내고 사기를 당하는 바보는 더 많은 돈을 보내준다는 소리에 솔깃해 제 손에 쥐고 있던 돈뭉치를 넘기고 마는 법이다. 돈이나 돈이 되는 재물 따위가 없다면 이 세상에 도둑도 없을 터이고 사기꾼도 없을 터이다. 삶이 괴로운 것이 탐욕 탓이다. 탐욕이란 한강물을 다 들이켜도 목말라한다. 이러한 탐욕에 놀아나는 목숨이라면 인간밖에 없다. 탐욕 부리는 금수도 없고 초목도 없다. 소는 배를 채우면 편안히 엎드려 새김질로 만족하고 배부른 호랑이는 사슴이 옆을 지나가도 탐하지 않는다. 한여름이 가까운 망종 무렵이 되면 감나무들은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열매를 다 영글게 하고자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저마다 제 능력에 맞게 영근 열매를 가을에 거두고자 툭툭 땅 위로 떨어뜨려버린다. 망종을 지나 감나무 밑에 가보면 도토리만 한 풋감들이 질펀히 떨어져 있고 이런 저런 곤충들이 떨어진 감의 진물을 빨고자 득실거린다. 왜 감나무는 익기도 전에 열매를 떨어뜨릴까? 능력만큼 익혀내려는 감나무의 뜻일 터이다. 사람 같으면 어림없는 짓이다. 가지가 부러진들 많을수록 좋다면 주렁주렁 달고서도 만족 못 한다.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이듯 (知常容이라)

知常容 容乃公(지상용 용내공) 
公乃王 王乃天(공내왕 왕내천)
天乃道 道乃久(천내도 도내구)

상도를 알면 모든 것을 끌어안아 품는다. 모든 것을 끌어안아 품음은 이에 공평함이고, 공평함은 이에 두루 통함이고, 두루 통함은 이에 자연이며, 자연은 이에 상도이고, 상도는 이에 영원이다. <노자 16장 참조>

한강이니 낙동강이니 금강이니 섬진강이니 이름을 지어 부르지만 그 강들이 바다에 이르면 강은 없어지고 만다. 바다는 땅 위에서 흘러내린 모든 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인다. 이런 바다를 생각해 보면 우주 삼라만상을 하나로 끌어않는 상도를 알아볼 수 있다. 만물은 하나하나 나누어져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로서 상도에 안겨 있음을 터득하여 깨우치고 있음을 일러 지상이라 한다. 지상은 지상도의 줄임인 셈이다. 다섯 손가락이 저마다 길이가 다를지언정 깨물어 아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부모는 자식들을 하나로 끌어안지 미운 놈 고운 놈 가려 차별하지 않고 여럿이어도 하나로 끌어안는다. 이처럼 하나로 끌어안는 어미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상도의 모습이다. 상도의 끌어안음을 한마디로 <용>이라 한다. 여기 용 이란 포용의 줄임으로 여기면 된다. 여기 용은 끌어안아 품음이다. 상도는 만물을 어떻게 끌어안아 품는가? 차별이나 호오나 귀천없이 모두 한결같게 끌어안아 품는다. 이러한 끌어안아 품음을 일러 하나-라 하고 더 널리는 무위니 자연이라 한다. 천지만물 중에서 오로지 사람만 상도의 용을 마다하고 제 뜻대로 차별하고 호오와 귀천을 따져 끌어안기도 하고 내치기도 한다. 이러한 꼴을 곡식이 자라는 논밭에 가보면 단번에 볼 수 있다. 왜 제초제를 뿌리는가? 곡식 외에 다른 잡초나 벌레를 없애버리기 위해서이다 벼논에는 벼만 자라야 하고 콩밭에는 콩만 자라야 하고 감자밭에는 감자만 자라야 한다. 그러나 언덕바지 풀밭에는 이런저런 온갖 풀들과 벌레들이 서로 뒤엉켜 산다. 만약에 그 풀들이 밭 안에 들면 잡초라면서 사정없이 뽑혀서 햇볕에 널려 말려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사람은 상도의 끌어안아 품음 즉 용을 어긴다. 사람은 입으로 공평무사를 외치면서도 하는 짓 보면 거리가 멀다. 상도가 만물을 하나로 품어 끌어안으니 절로 공평함을 이룬다. 그래서 용하면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면서 내 편 네 편 따지지만 상도에는 없다. 모두 다 하나이니 편 가름 따위란 없다. 산야에서 토끼는 토끼대로 살게 노루는 노루대로 살게 멧돼지는 멧돼지대로 살게 내버려두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는다. 그래서 온갖 목숨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살아간다. 이렇듯 공평하니 걸릴 것이 없다. 그래서 공은 곧 왕이다. 왕이란 왕인지라 걸림 없이 오고감이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로 통함이 왕이다. 이렇듯 공평하니 오고감이 왕인지라 왕은 자유롭다. 그러니 왕은 자연이다. 그래서 왕내천이라 한다. 왕은 걸림 없이 통하는 길이니 천이다. 왕도 곧 천도라고 함은 자연인 까닭이다. 그냥 그대로 따르지 조작하지 않음이 왕이요 천이다. 성왕은 백성을 하나로 끌어안아 품과 폭군은 백성을 제 맘대로 부리면서 제 것인 양 그물질한다. 성왕은 순천하니 왕은 곧 자연이고 폭군은 역천하니 재앙을 뒤집어쓰고 만다. 그러니 하나로 끌어안아 품음은 공평무사하고 공하니 걸림 없이 통하고 왕이 자연이고 천이 곧 상도가 된다. 그래서 천내도가 하는 것이다. 상도만은 영원하다 왜 영원하다 하는가? 상도는 무시하고 무종한 까닭이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니 항상 그대로이다. 그런지라 상도는 불생불사한다. 이를 묶어 한 글자로 구하다 한다. 우주 삼라만상을 내고 들이는 이 상도를 따르면 그 무엇이든 제 목숨 제대로 누리고 살다 갈 수 있으니 이 또한 구이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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