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감기와 눈병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감기와 눈병
  • 하동뉴스
  • 승인 2020.12.2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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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와 눈병
                                      천지경


남편은 감기에 걸렸고 나는 눈병이 났다
감기에 전염될까 등 돌리고 자는 여자
눈병이 옮을까 시시때때 경계하는 남자
세상에서 제일 멋져 보여 결혼했던 남자
콩깍지 씌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위대해 보였던 때 있었느니
돈 문제로 새끼들 문제로
수십 번 전쟁을 치르고 살았다
권태기 지나고 갱년기 걸쳐
장년기로 접어든 나이
기침 소리가 듣기 싫고
눈꼽 낀 눈이 보기 흉하지만
평행선 긋고 같은 방향 가야 하는
감기와 눈병

-2020경남시인협회 앤솔러지<경남시학>11호

【시인 소개】
천지경 / 1963년 경남 진주 출생. 2009년 《불교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울음 바이러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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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이제까지 우리가, 아니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었습니다. 사람이 가장 무서운 한해였고, 사람이 가장 그리웠던 한해였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사람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을 만큼 인간은 절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던 한해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이면서 철학자였던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습니다. 차마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 학살의 시대를 지나고도 어찌 세상은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 정도는 아니어도 시인들은 올해 곰살맞은 시를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도 데면데면합니다. 평생을 살 맞대고 살아온 부부인데도 감기와 눈병이 틈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니 권태와 무관심으로 틈은 이미 나 있었는데 감기와 눈병이 그 틈새를 확인시켜 주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부부가 감기와 눈병으로 갈라설 수 없듯이, 코로나라는 감염병으로 우리의 삶과 꿈을 포기할 수야 없지요. 
5인 이상 모일 수도 없는 연말연시입니다. 손을 뻗쳐도 맞잡을 수 없는 그 거리가 그리움을 만들 것입니다. 적당한 미움과 편안함이 만드는 평행선이야말로 사랑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지혜가 아닐까요?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가 더욱 건강해지듯이.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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