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하동 문화관광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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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21.03.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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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있는’ 하동 -

□최치원이 마구 휘갈겨 쓴 글 넉 자,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雙磎?石門 바위]쌍계사 입구 쌍바위 앞에 선 최치원은 지팡이로 왼쪽에 있는 바위에 ‘雙磎(쌍계)’란 글자를, 오른쪽에 ‘石門(석문)’이란 글자를 휘갈겨 써버렸다.
이 글을, 누군 ‘악기 액운 쫒는 부적 같은 글씨’라고 하고, 누군 ‘청학동으로 가는 바로 그 전설적인 문’인 석문(石門)이다’며, 찬사를 날린다.
남명 조식은 <유두류록>에서 ‘쌍계?석문’이란 글씨를 보고, ‘글 획이 큰 것은 사슴의 정강이와 같다’고 찬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보는 사람마다, 제각각 감탄을 하거나 실망을 하고, 여하튼 한마디씩은 꼭 던지고 만단다.
“아이들 습자지에 연습하던 글 솜씨 밖에 안 되는 글이건만.....쯧쯧” 혀를 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심 없이 써 버린 천하의 일필휘지로다”고 말을 던진다.
또 하나는 남명 조식의 ‘사슴의 정강이와 같다’는 표현을 두고, “조식이 칭찬을 하긴 했지만 사슴 정강이 같다고 한 것은 뼈가 있는 말이다. 무릎 아래에 앞 뼈가 있는 부분을 정강이라고 하는데, 정강이가 그리 아름다운 부분이 아니다. 못썼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여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정강이니까 별로지, 사슴의 정강이는 미끈한 아름다움을 표시한 것으로 글씨가 미끈하게 잘 빠진 모양을 찬탄한 것이다. 천하에 미려한 글씨다”며, 칭찬을 한다.
또 누군 “서까래 크기의 획이다”며, 크기만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서예를 10년 했지만 이 정도는 석 달이 못돼 쓸 수 있는 평범한 글”이란 말까지 한단다.
아, 雙磎?石門 바위…….
이 글을 보면 꼭 한 마디씩 하는 것이 예의 인가보다. 감탄이든 실망이든, 애정이 있으니 말이라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자, 한 마디 하자.

□‘석문’이, 이완용 일가의 글 때문에 똥바위가 된 비극
[석문 바위, 똥바위로 불린 사연]쌍계?석문(雙磎?石門) 중 석문 바위 한쪽 면에 매국노 이완용 친필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내용은 이완용 일가를 기념한 것이다. 
‘석문’ 바위 왼쪽, 사람이 지나는 길 쪽의 바위면 중앙에 쓰인 글이 ‘이완용이가’ 쓴 글이다.
쌍계사로 들기 전, 이완용의 글을 찾아보는 것도 묘미다. 쓴 글은 이렇다.

나무아미타불(南阿彌陀佛)
순상국이공호준유혜불망(巡相國 李公鎬俊遺蕙不忘)
자참판윤용대교완용(子參判允用待敎完用)
종손지군원구(從孫知郡源九)’
해석은 ‘서방정토(극락세계)의 교주이신 아미타 부처님께 항상 돌아가 의지합니다. 순상국 이호준공의 남기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아들 참판 벼슬하는 윤용과 대교 벼슬하는 완용, 종손자 지군 원군.’ 이완용이 언제 쌍계사에 다녀갔는지는 모른다. 완용의 이복형 윤용이 병조참판을 지낸 때가 1885년이었고, 완용이 규장각 대교를 지낸 때도 1885년이었다. 아마도 1885년 전후로 쌍계사를 다녀갔던 것 같다. 

1928년 화개국민학교가 생길 때 폐교하기 전까지, 1904년 하동군 최초의 신식학교인 보명학교가 쌍계사 경내에 있었다. 이 학교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등교 때마다 이완용 일가의 이름 위에 똥오줌을 뿌리게 했다고 한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이 일대 주민들은 ‘똥바우’ ‘똥바구’라고도 부른다. 관광객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에게 꼭 10원짜리를 들먹이고 만다는데….

□‘雙磎 石門’이란 글을 보고, 소요선사는 시 한 편을 남기고….

[소요선사]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 씩 한다는 ‘쌍계, 석문’이지만, 바위의 글을 보고 쓴 시가 좀 있다. 특히 소요선사는 이 글을 보고, 鼓翼淸吟付石門(고익청음부석문)이라했다. 직역을 하면 ‘북치는, 날개, 맑게 읊는 소리, 석문에 새기다’ 정도다. 해석하기 어려웠는데 상상력을 발휘해, ‘(글자를)휘갈기는 맑은 소리가 석문에 새겨진다’고 풀어봤고, 맞는 것도 같았다. 그의 시는 쌍계석문 바위 뒤에 새겨져 있다.

頭流方丈眞仙界(두류방장진선계, 두류산 고승처소는 신선의 자리로다.)
鼓翼淸吟付石門(고익청음부석문, 휘갈기는 맑은소리, 석문에 새겨짐이여)
石門筆跡人間寶(석문필적인간보, 석문에 스민 필적 인간세상 보배로다)
遊戱金壇鎖白雲(유희금단쇄백운, 신선이 춤추고 노니, 흰구름이 가려준다.)

소요선사 또 다른 시 열반송이다. ‘해탈이 해탈이 아니고/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취모광이 빛나고 빛나니/구설이 칼끝을 범하네.(解脫非解脫 涅槃豈故鄕吹毛光樂 樂口舌犯鋒鎚)’
소요의 시는 참신하고, 경이적이었다고 한다. 역대 선사들이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작품을 내놓은 시인도 드물었다. ‘구설이 칼끝을 범하네’란 섬짓한 표현은 사람을 정통을 두들겨 패는 것 같다. ‘구설’은 ‘시비하거나 헐뜯는 말’을 뜻한다. 
소요의 속명은 오씨(吳氏)다. 소요태능(太能)으로 불린다. 서산대사의 4대 제자 중 1명이다.

서산대사가 75세 때 소요태능이 찾아와 간절히 가르침을 청했다. 하지만 대사는 소요가 외다시피한 <능엄경>을 주며 익히라 했다. 소요는 크게 실망했다.
하루는 방문을 열자, 서산대사가 화들짝 놀라며 책을 숨겨버렸다. ‘대단한 비결같은데….’ 제자인 자신에게 주지 않음이 너무도 서운했다. 몇 년이 지나고, 삐친 소요는 결국 떠나기로 했다. 서산이 떠나는 그에게 숨겼던 그 책을 쑥 내밀었다. 책을 받고 그는 떠났다. 한참을 걷다 ‘그렇게 숨기던 내용이 뭔가’ 싶어 책을 열었다. 너무도 짧은 글귀 몇 자 뿐이었다.
‘가소롭다 소를 탄자여/소를 타고도 소를 찾다니/장차 그림자 없는 나무가 되면/물속의 거품은 꺼지고 말리니/’
소요는 움찔했고, 순간 ‘확철대오’ 했다. 바로 돌아가 스승을 뵈니, 서산대사는 앉은 채 입적해 있었다. 서산대사의 ‘죽음의 시’가, 그를 끝내 깨치게 만든 거였다.

▣화개와 쌍계에 있었던 1000년 전 그 희대의 도둑 ‘삼법’이 중국으로 건너가….
신라 성덕왕 때 ‘희대의 도둑 스님(?)’ 있었다. 삼법스님과 대비스님인데 그들의 대범함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쌍계사기에 이르길, 삼법스님은 신라문무왕 당시 스님으로 영리하고 현명했고, 경율장에 뛰어난 팔방미인이었다. 삼법은 당대의 생불이었던 당나라 육조혜능의 가르침을 찾아뵙고 배우기를 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육조혜능은 석가모니의 불법을 중국으로 전수한 달마대사의 6번째 법통을 이은 제자였다. 이 혜능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은 삼법은 통곡하고, 향을 살라 애통함을 표했다.
6년 뒤 혜능의 법문집인 ‘육조단경’에 적힌, 예언 부분을 읽고, ‘지극하면 통하리’하고, ‘등신불이 된 육조혜능의 머리’ 즉 죽은 스님의 ‘목을 잘라’올 것을 결심한다. 삼법은 먼저 김유신 장군의 부인 ‘법정리(김유신 사후 비구니가 된다)’에게 2만금을 빌리고 상선을 타고 중국 남부의 강서성으로 간다. 멀고먼 길이었다. 

죽어서 목이 떼여 신라로 갈 운명이었던 육조 혜능은 글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어록 ‘육조단경’은 부처님 이후 ‘경’이란 반열에 오른 법문집이 됐고, 달마가 전했다는 선(禪)법을 꽃피운 지금까지도 불교 최고의 스승이다. ‘조계일적수(曹溪一滴水)’란 말이 있는데, ‘조계의 물 한방울’이란 뜻으로 그의 가르침이 지금 불교의 선을 확립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통 불교종단인 조계종도 이 조계에 따랐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느냐”고 한 스님이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두 스님이 싸우며 “이쪽으로 흔들린다” “저쪽으로 흔들린다”고 하자 “흔들리는 것은 스님의 마음이다”고 정곡을 찌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육조혜능은 살아서 오랑캐였고, 도를 깨친 뒤엔 시기와 질투로 도망 다녀야 했고, 죽어선 목이 떼어져 신라로 가는 팔자 사나운 운명이었다.

삼법은 강서성 백율사에서 신라 사람인 대비선백 스님을 만나고, 이 절에 사는 장정만이란 장골에게 2만금을 모조리 주고, 결국 육조혜능의 머리를 떼어 가지고 신라로 돌아온다. 쉽게 말해 죽은 혜능의 목을 잘라왔다는 것이다. 선덕여왕 여근곡 전설로 유명한 경주 영묘사에 혜능의 머리를 모시고, 밤마다 공양을 올렸다한다. 꿈에 육조혜능이 나타나 게송을 읊기 시작했다.

‘내 이 땅에 돌아온 것은/부처님 나라와 인연이 있음이라/강주의 지리산 아래/칡꽃이 눈 속에 천지라/사람 사는 곳은 꿈 속 같고/산수는 연꽃같이 묘하다네/내 법은 본래 무심하니/나의 무덤 만년의 복전이리라.’ 이때가 한 겨울이었다. 하지만 이 게송에 따라 삼법은 대비스님과 함께 ‘강주의 지리산’ 지금의 진주지방인 지리산 칡꽃이 만발한 곳을 찾는다. 한 겨울에 칡꽃이 있는 곳을 찾아내고, 돌을 잘라 함을 만들어 머리를 묻고,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이곳이 옥천사였고, 쌍계사의 전신이다.

육조혜능의 머리는 지금의 쌍계사 금당에 모셔져 있다. 칡꽃이 만발한 곳 즉 한겨울에도 꽃이 피는 곳, 이곳이 지금의 ‘화개’다. 육조혜능과의 인연으로 지어진 이름이 화개인 것이다.
삼법은 이 옥천사에서 18년을 수도하고, 육조단경을 소리 내어 읽다가, 이 희대의 도둑스님은 앉아서 입적한다. 글/하동군·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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