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하동뉴스가 권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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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21.03.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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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제1장 낳아주되 갖지 않는다
제2장 성인께는 정해 둔 마음이 없자
제3장 경솔함은 곧장 뿌리를 잃는다
제4장 제 태어난 바를 싫어하지 말라
제5장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이 없다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이다(曲則全 곡죽전이라)

曲則全  枉則直  곡즉전 왕즉직
窪則盈  弊則新  와즉영 폐즉신
少則得  多則惑  소즉득 다즉혹
是以  聖人抱一  시이 성인포일
爲天下式        위천하식
꺾으면 곧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 곧아지며, 움푹하면 곧 채워지고, 낡으면 곧 새로워지며, 적으면 곧 얻고, 많으면 곧 헷갈린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하나를 지켜서 세상의 법식으로 삼는다. <노자 22장 참조>

손등과 손바닥을 나누어 돌로 보고 전후로 나누어 돌로 봄은 사람의 짓이다. 손등 따로 손바닥 따로 둘로 나뉘면 손은 제 노릇 못 한다. 등과 바닥이 하나가 되어야 손이 되어 제대로  손 노릇 한다. 선후 좌우 상하 장단 대소 다소 곡전 등등 둘로 나누어 사람들은 호오를 변덕스럽게 드러낸다. 그런 변덕을 인위라 한다. 그런 변덕 부리기를 밥 먹듯 해 부분이니 전체니 따지고 덤비며 입방아를 찧는다. 인간은 이처럼 무엇과 무엇은 왜 다른가를 따지고 부분은 부분이고 전체는 전체라는 듯이 쪼개고 나누어 갈래 짓고서는 둘로 쪼개고 나누어 아는 척하기기를 좋아한다. 부분과 전체를 둘로 보면 허물어지고 깨지고 부서진다. 배 속에는 오장이 있다. 심장 간장 폐장 비장 신장 중에 어느 하나를 더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 산목숨이다. 오장을 하나하나 따져 심장 간장 폐장 비장 신장 등등 이름을 붙여 부르지만 그렇다고 다섯 개라고 부분으로 따로 나누어서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나하나가 부분으로 제각각 떨어져 쪼개질 수 없는 것이 배 속이다. 산목숨은 온갖 장기가 하나하나 부분이 아니라 모두로서 하나가 되어야 산다. 산목숨치고 그렇지 않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산목숨이야말로 그 무엇이든 곡즉전이다. 곡즉전에서 곡은 일부를 말하고 전은 전부를 말한다. 일부란 전부에서 떨어져 나옴이니 곡을 절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니 전체에서 부분으로 잘라냄이 곧 곡이다. 풀밭에서 펄펄 살았던 소를 인간은 도살장으로 끌고 가 살생하여 가죽을 벗기고 배통을 갈라 내장을 끌어내고 몸통을 칼로 각을 떠내 목등심 꽃등심 채끝 안심 우둔 갈비 양지 설도 사골 사태 등등 부분을 갈라놓고 입맛 따라 값을 부른다. 한 몸이었던 산목숨이 인간한테 붙들려 조각조각 나서 살덩이나 뼛조각으로 쪼개져 쇠고기라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인간은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둘로 갈라놓고 시비를 걸고 호오를 자아낸다. 수풀을 보면 나무도 보아야 자연을 마주한다. 자연이란 언제나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온갖 초목이 하나로 있는 수풀만 보고 초목을 보지 못한다면 부분을 외면함이고 초목만 보고 수풀을 보지 못한다면 전체를 외면함인지라 같음과 다름을 둘로 나누어 보고 만다. 인간이 왜 시비를 걸고 호오를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겨루기로 세월을 보내자고 아우성이겠는가? 곡과 전을 둘로 보기 때문이다. 곡과 전을 둘로 나누어 따로 갈래짓기보다 하나로 합쳐 어울리게 할수록 생각하는 마음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맑아지고 밝아진다. 이를 일러 자명이라 한다. 바깥 것들을 잘 알면서도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또 그렇게 하려고도 않는 성질머리가 날로 드세져 가는 세상이다. 서로 어울려 같아지는 쪽보다 서로 갈라져 달라지는 쪽을 택하려는 세태인지라 개성이라는 것을 뽐내야 광이 난다고 힘을 준다. 이런 탓으로 자신을 꺾어 물러서면 망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All or Nothing'이라 서슴없이 외쳐댄다. 그러나 세상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니 세상을 제 것인 양으로 엄벙댔다가는 속절없이 수렁에 빠지고 만다. 얕보면 개미귀신이 파놓은 깔때기 같은 함정이 되어버리는 덫이 곧 이 세상이다. 그러니 부분을 팽개치고 전부를 구하려 한다면 그 누구든 세상이라는 덫에 걸려들고 만다. 그러니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이라는 곡즉전으로 가면 세상이라는 덫은 걷어진다.

 

-자연의 도리에는 친밀함이 없다

天道無親  천도무친
常與善人  상여선인
자연의 도리에는 친밀함이 없고 천도는 선한 사람과 항상 함께한다. <노자79장 참조>

자연을 풀이하여 천도무친이라 한다. 물론 무위를 풀이하여 그렇게 말한다고 여겨도 된다. 무의-자연은 곧 상도를 밝히는 말씀이다. 자연은 무친이고 무위도 무친이고 따라서 상도의 짓 즉 조화란 무친이다. 무친이란 편애함이 없다는 말이다. 제 자식이라고 해서 유별나게 아끼고 봐주기는 사람만 하는 짓이다. 인간은 당당하게 부자유친을 인륜의 벼리로 삼는다. 유친은 내 피붙이와 남의 피붙이를 달리 대함이다. 남의 자식은 내 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고 남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유친이다. 인간은 이것이 곧 천륜이라고 호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담은 인간이 그렇다고 주장할 뿐이지 천지가 사람을 다른 목숨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우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유친을 앞세우지만 천지에는 유친함이란 없고 무친할 뿐이다. 굶어가면서 알을 품어 껍질을 깨고 새끼가 나오면 먹이를 물어다 정성껏 돌보고 키우는 어미 새를 생각해 보라. 드디어 새끼들이 날개에 힘이 붙어 모이를 찾을 수 있게 되면 한 며칠 모이 찾아먹는 법을 가르쳐준 다음 사정없이 새끼들을 내쫓는 어미 새를 생각해보라. 물론 어미 새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람만 빼고 온갖 목숨들이 먹이를 찾아먹고 살 수 있게 될 때까지만 제 새끼들을 돌봐줄 뿐이다. 그러니 사람을 뺀 모든 목숨들은 다 천도 즉 자연의 이치를 따라 무친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러구러 하면서 인간은 무친을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리고 유친의 인륜 따라 천지가 마치 인간을 위해서 있는 양 겁 없이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선악의 삶을 벗어날 수 없어 길흉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래도 옛사람들은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못된 짓을 범하면 천벌을 면할 수 없다고 믿었던 세속이 있었다. 공자가 왜 군자와 소인을 나누었겠는가? 천명을 두려워하는 무리를 군자라 일컫고 천명을 얕보는 무리를 소인이라 불렀다. 물론 군자는 결코 흔치 않았고 소인들이 온 세상을 채우고 득실거리며 판을 쳤다. 그렇더라도 천명을 두려워하는 군자라는 호칭은 살아서 그렇게 못한 소인들을 뜨끔하게 하는 약효를 냈었다. 지금이야 군자라는 인간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러진 잣대 꼴이다. 자연에는 선악이란 없다. 따라서 자연을 그대로 따라 사는 목숨들한테는 선악이란 없다. 오로지 인간한테만 선악이 따라 붙는다. 만약 인간이 진실로 무친하다면 그 순간 인간이 겪는 선악도 사라질 터이다. 무친하면 무사하고 무사하면 무욕하게 되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걸림이 없어질 터이고 속임수나 속셈들이 없어질 터인지라 이해득실을 두고 흥정하는 저울질 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내 몫을 챙겨야 하고 따라서 욕심을 버릴 수 없으니 이해가 서로 부딪치고 득실이 균형을 잃을세라 저울눈금을 제 쪽으로 후하게 하고서 온갖 수작을 꾀하면서 저절로 악이 인간에게 들러붙고 만다. 사람과 사람사이가 참으로 공평하여 무사하다면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무친하면 절로 선은 따라온다. 왜냐하면 무친은 곧 천도를 따름이기 때문이고 그 자연의 이치를 따라 이음이 곧 선이기 때문이다. 법 자연 즉 자연을 본받아 따르면 곧 선이다. 무친하면 저절로 자연을 본받아 따름이니 무친은 곧 선함이다. 그러니 천도는 저절로 선한 사람과 함께하게 된다. 선인은 누구인가? 무사한 사람이다. 무사하면 선해지고 선해지면 곧 천도를 따라 절로 선한 사람이 된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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