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 나라 팔아 챙긴 돈,  화투판에서 날렸다.
 [노년의 고동소리] 나라 팔아 챙긴 돈,  화투판에서 날렸다.
  • 하동뉴스
  • 승인 2021.04.1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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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반, 꺼져가는 촛불 신세의 조선에 부채질을 해대던 일본은 매우 교활한 수법 한 가지를 미리부터 쓰고 있었다. 허수아비인양 이름  뿐인 고종 황제를 끼고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대신들은 일본이 급진적으로 보급시킨 ‘화투(花鬪)’에 정신이 팔여 있었다. 1876년 개항이후 일본은 투전과 골패가 도박의 수단이던 한반도에 화투를 급속히 확산시켰다. 화투는 훨씬 더 사람들의 혼을 몰입시키는 노름 방식이었다. 남녀노소 상하 구분 없이 화투판이 조선인들 생활 구석구석 마다 널리 퍼졌다. 나라를 주무르는 벼슬아치들은 한술 더 떴다. 대신들은 일과를 재낀 채 삼삼오오 무리 지어 술판을 곁들인 화투판에서 날 새는 줄 몰랐다. 1909년 3월 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재작일(再昨日)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씨 집 산장에서 모모 관인들이 모여 화투판 노름을 벌였는데, 박의병 씨가 3000환을 잃고 이완용의 종질 이용구(李容九)씨가 5000환을 땄다더라” 또 같은 해 4월 9일자에는 “중추원 고문 이지용(李址鎔) 씨가 근일 자기 집에서 화투판을 크게 벌이고 최진택 씨의 돈 2만환을 따먹었다는 사실이 있어 헌병사령부에서 정탐 중이라 하더라”고 보도됐다. 당시 순사 한 달 봉급이 20환 남짓하던 시절에 정부 고관들은 이처럼 엄청난 큰돈으로 도박판을 벌려 놀았다니, 나라꼴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지용은 사도세자의 5대손으로, 고종 황제의 5촌 조카뻘이다. 그는 유별나게 도박을 즐겼다고 역사에 기록됐다. 이지용은 17세 때 벼슬을 시작, 황해도 관찰사, 궁내부 협판, 주일 전권 공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나라가 없어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뇌물을 받고 군수직 열 다섯개를 팔아먹었다. 그런 경력의 이지용이 오늘날의 외교부 장관격인 외부대신에 올랐다. 그때 한국은 일본의 바램에 따라 1904년 드디어 일본과 ‘한일 의정서’를 조인했다. 양측 대표는 한국의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 공사 하나부사(林權助)였다. ‘한일 의정서’는 일본이 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빼앗은 매우 악질적인 조약이었다. 앞서 같은 해 2월 일본 공사관은 ‘한일 의정서’ 조인에 앞서 외부대신 이지용에게 우선 뇌물 1만환을 먹였다. 거금을 삼킨 이지용은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한일 의정서’ 조인을 일본 보다 더 서둘렀다. 꿀 먹은 벙어리보다 더했다. 3월 11일 일본은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라는 이름의 군대를 합법적으로 서울에 주둔시켰다. 추밀원 의장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서울에 파견, 의정서에 규정한 내용의 과감한 실천을 한국 정부에 강요했다. 나아가 의정서 조문을 확대 해석, 광활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통신시설도 군용으로 쓰겠다며 강제로 빼앗거나 증설하였다. 거기다가 조선 정부는 경부(京釜)·경의(京義)선 철도 부설권까지 일본에 안겨 일본의 침략 야욕을 북돋웠다.

 이듬해 이지용은 내부대신으로 영전, 을사 늑약에 찬성, ‘을사 5적’에 이름을 올려 천추에 씻지 못할 ‘매국노(賣國奴)’가 됐다. 이지용은 일제로부터 받은 거액의 은사금을 도박판에서 탕진했다. 세간에는 벼슬을 팔던 ‘매관적(賣官賊)’이 어느새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더니 그 추악한 돈을 주체 못해 결국 도박판에서 날려 버렸다는 말이 퍼졌다. 이지용은 밤낮 없이 벼슬아치 찌꺼기들과 어울려 거액의 도박판을 벌였다. 그의 거처는 전국의 도박꾼들 소굴이 되었고, 그가 애지중지 자랑하던 한강변의 용산 정자도 노름빚에 넘어가 버렸다. 나라가 없어진 이듬해 1910년 6월 어느 날, 매국노들은 이지용의 거처에서 거액이 왔다 갔다 하는 노름판을 벌였다. 신고를 받은 일본 헌병들이 들이 닥쳤다. 조정 대신들이 노름판에서 침략국 헌병들에게 쫓기는 꼴이 됐으니, 마당에 노는 개가 웃을 일이다. 이지용은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넘어져 빰짝이 찢어지는 큰 상처를 입었다. 도박범 이지용은 일본의 한국 병탄에 기여한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백작 작위와 평생 써도 남을 만큼의 10만환 은사금을 받았다. 그러나 1912년 화투판에서 체포된 이지용은 재판을 받고 귀족 예우는 벗겨지고 말았다. 나라를 팔아 챙긴 돈은 도박판에서 탕진하고 하루아침에 거지가 됐다. 이지용은 1928년 더러운 삶을 마감했다. 욕된 삶 58년이었다. 한참 모자라는 고종 황제와 부패한 왕족들, 썩은 벼슬아치들 밑에서 백성들은 죽음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했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계 지도에서 지워져 버렸다. 나라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 했다. (사)대한노인회 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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