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하동군 스토리텔링
[연재] 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하동군 스토리텔링
  • 하동뉴스
  • 승인 2021.04.2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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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모전] 영모전은 중생에게 생명의 감로수를 내린 뜻을 길이 기억하고 숭배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생명의 감로수는 불교의 진리를 말한다. 쌍계사 영모전은 창건주인 진감선사의 얼굴을 그린 그림인 진영을 비롯, 지순, 사명, 부휴, 벽송, 소요대사 등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진영이 남은 스님들은 모두 잘 생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쌍계사 마애불] 쌍계사 마애불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모습의 마애불이라고 안내문에 적혔다. 솔직히 특이하다기보다는 '귀엽다.' 큰 바위에 툭 튀어나온 것처럼 불상을 새겼다. 굴을 파고 부처를 모신 감실과도 같은 느낌의 부처라고 하는데, 앞으로 쏟아질 듯 조는 것 같기도 하고, 마루 끝에 앉은 느낌도 있다. 동자스님 말고 소년 스님 같은 느낌이다. 머리가 크고 살집이 많은 얼굴에 귀가 어깨까지 쳐졌다. 전체적으로는 소박한 느낌의 마애불이다. 절을 하는 대신 얼굴을 쓰다듬고 싶은 부처다.

▣진정국사란 이름의 희대의 문장가, 지금 읽어도 얼얼한 그의 모던이즘 시(詩)
[진정국사] 진정국사는 진정, 희대의 문장가였다. 쌍계사에는 그의 흔적이 세월 속에 흐르고 있다. 쌍계사에 그 유명한 육조 혜능을 모신 금당이 제일 위, 쌍계사 팔상전과 청학루는 위 아래로 나란히 서 있다. 청학루와 팔상전 두 건물은 고려말 충렬왕과 공민왕 때 진정국사가 창건했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 팔상도다. 이 팔상도를 그려 붙인 곳이 팔상전이다. 참선을 하고 강론을 하고, 글을 쓰고 차를 마시던, 1500년 전의 선사가 머물고, 뭔가를 툭 던져 물을 것 같은 분위기, 왜 청학루에서 글 짓는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까. 이 청학루는 뭇중생의 기도와 참회를 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임진왜란에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시를 짓거나 참선 수행하던 곳이기도 하다. 진정국사는 ‘진정’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공민왕의 스승이어서 ‘국사’란 호칭이 따라 붙는다. 진감국사가 청학루를 짓고, 금당 아래 돌 틈으로 흐르는 옥천샘물을 받아 청학루에 올라 지었을 법한 시 한 수, 아래는 그의 시다. ‘몽정 산에 구한 귀한 차/ 혜산 천에서 기른 좋은 물/졸음을 쓸어 버렸다/객 맞아 한가하다. 감로는 털구멍에서 흐르고/바람은 겨드랑이 사이로 흐른다/어찌, 영약을 마셔야만/아이얼굴을 가진다 했나.’ 그는 희대의 문장가였고, 13세기 고려 최충헌의 무신정권이 폭정을 하던 때에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고승이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스님들이 무신정권에 협조하지 않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법명은 천책이고, 천책스님으로도 불린다. 20세 때 과거에 급제 했지만 어느 날 출가를 결심하고 세상을 떠나버린다. 유명한 ‘허망의 노래’가 있다.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모던이즘 시가 아닐까 싶다. ‘딱하도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허망한 세상에 허망한 인생을 살고 있다. 저들이 허망한 몸으로 허망한 말을 타고 허망한 길을 달리며 허망한 기교를 잘하여 허망한 사람으로 하여금 허망한 일을 보게 하고 다시 허망한 위에 허망함이 또 허망하게 된다는 것을 세상 사람아 너희는 아는가 모르는가…. 다산 정약용은 역사가 생긴 후 고려 말까지의 3대 문장가로 최치원, 이규보와 ‘진정국사’를 꼽았을 정도였다. 정약용이 화개 차 한 잔에 진정국사의 글을 읽고, 얼얼한 충격에 휩싸였을지 모를 일이다.

▣글쓰는 이들을 기죽게 하는 진감선사 대공영탑
[대공영탑] 글을 써 밥 먹는 사람들이 진감선사 대공영탑을 마주보면 기가 죽는다고 한다. 그것도 ‘팍’ 죽는다고 한다. 이건 사실이다. 대공영탑은 국보 제 47호다. 47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부석사 조사당 벽화(浮石寺祖師堂壁畵)’다. 48호는 강원 평창군에 있는 고려시대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이다. 쌍계사 대공영탑 바로 앞은 없어졌지만 연못이었다. 이 연못에 불기운이 비치면, 건너편 산에는 구름이 인 뒤, 비가내리고 무지개가 서곤 했다. 대 장관이었을 거다. 이 무지개가 선 곳을 ‘무지개골’이라 불렀다. 쌍계사 스님들은 이 무지개골 산등성이에 용이 산다고 해, ‘용강’이라 불렀고, 마을의 남쪽 도로변에 위치한 아래뜸을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해 와룡동이라 부른다. 지금의 용강리 ‘새동네’가 바로 와룡동이다. 새 동네는 용강마을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다. 왜 늦을까. 누운 용이 있으면 여의주가 있는 법 아닌가. 용이 누운 곳, 천하 길지를 누군가가 건드리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닐까. 새동네가 생긴다는 것은 용을 깨웠다는 뜻이다. 대공영탑 이야기하다 옆으로 좀 샜다.
대공영탑은 통일 신라 시대의 비석으로, 쌍계사 대웅전 앞에 어깨를 떡 벌리고 자신만만하게 서 있다. 1000년이 넘은 비석이라 깨지고 금이 간 자국이 있지만 하도 글자가 많고 희미해, 슬쩍 지나치기 쉽다. 또 한자에 기죽어 외면해 버릴지도 모른다. 이 비문은 진성여왕 1년(887) 문장가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쓴 글이다. 진감선사의 행적을 쓴 것이지만 최치원 작심한 듯 쓴 멋진 명문장이다. 진감선사가 살아난 듯한데, 쓴 최치원 마저 같이 살아나고 위대해 보이는 명문장이다. 문장은 화려하고, 정교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미의 어휘, 적절한 예시가 빛난다. 첫 부분에 모든 종교사상을 논하고, 둘째부분은 선사의 생애를, 마지막은 최치원이 비문을 짓는 경위와 자신의 심경을 적었다. 광범위한 예를 들고, 장황하게 썼지만 그 시대의 누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쓰고, 빨려들 듯 읽히게 하는가. 누가 이렇게 쓸 수 있었단 말인가. 글 쓰는 이들을 딱 기죽게 하는 명문 중에 명문이다.

□생선장수에서 득도한 대선사 진감, 신라왕보다 인기 있었던 큰스님
[대공영탑 해설 ] 최치원이 쓴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영탑(국보 48호)에 그의 행적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진감선사는 신라 후기의 스님이다. 얼굴이 검어 ‘흑두타’란 별명을 얻었다.
진감선사는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때 투항한 한(韓)족의 후손이었다. 중국 한족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감선사 어머니의 꿈에 듣도 보도 못한 인도의 스님이 나타나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되길 바랍니다”라며, 유리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꿈을 꾼 뒤에 신기하게도 아기가 생겼고, 태어나면서 울지 않았다. 선사의 고향은 전북 익산, 속성은 최 씨다. 금쪽같은 내 새끼였을 텐데, 자라면서 말이 없어 그의 부모를 애먹였을 것이다. 집은 한 말 곡식이 없는 가난한 집이었다. 한 뙈기 땅도 없어 생선을 팔아 부모를 공양하는 생선장수로 살았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뱃사람이 되어 중국으로 갔고(804년), 지금의 하북성 창현으로 신감대사를 찾아가 절을 올렸다. 이때 신감대사는 기다렸다는 듯 이 얼굴 검은 낯선 사람을 반겨 맞는다.
“이별한지 오래지 않았는데 기쁘게도 다시 서로 만났구려”한다. 대사는 진감선사의 머리를 바로 깎아주었고 승복을 입게 했다. 승려들이 선사를 보고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 구나”라며 감동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적시한 장면이다. 전생에 이어, 이번 생에 또 만난 이들의 감회는 도대체 어떤 걸까. 전생에 뭐였는지도 모르는 우리는 도 높은 선사들의 기분을 알 길이 없다. 선사는 종남산에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솔방울을 먹고 3년을 수도하고, 산을 나와 4거리에서 3년간 짚신을 삼아 나그네에게 공짜로 주는 고행을 했다. 아마 생선장수를 하면서 지은 살생의 업을 소멸시키 위함이 아니었겠나. 27년 만에 선사는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고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흥덕대왕이 직접 글을 써 선사를 맞으며, “마땅히 동쪽 계림의 경내에 운수가 가득한 사원을 세우리라”며 환영했다. 살아있는 부처님이 이 땅에 왔으니 임금이 그랬는데, 만백성들은 어쨌겠는가. 선사는 처음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있다가 걸어서 강주(진주)의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지리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떡 버티고 섰더니 길잡이 마냥 길을 열고, 안내하기 시작했다. 선사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들기며 불경소리를 듣게 했다. 838년 민애대왕이 보위에 오르자 왕은 사신을 보내 선사에게 ‘복 빌어주기’를 원했다. 선사가 “선정을 펼치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발원할 거냐”고 하자 왕이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고 한다. 임금이 참 순진했다는 느낌도 들고, 선사의 법력이 대단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때 선사는 왕에게 “왕의 땅에 살면서 누가 임금을 위해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하필이면 마른나무와 썩은 나무 같은 저에게 외람되게 왕께서 말씀을 전하십니까. 말을 타고 저에게 온 사람들이 배고파도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물을 마실 수 없으니, 이 점이 염려될 뿐”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 말에 감동하는데, 당시 순진했던 사람들이야 오직했겠나. 이후 왕이 혜소란 호를 하사했고, 뒤에 사신을 보내 3번을 수도 경주로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선사는 거주하던 절에, 대나무를 걸쳐 물길을 끌어 사방에 흐르게 하고, 옥천이란 절 이름을 지었다. 이 옥천사가 지금의 쌍계사다. 북방의 좋은 향을 선물 받으면 질그릇에 불사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중국차를 받치는 사람이 있으면 끓는 돌솥에 넣어버렸다.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일지 알 수 없다. 배를 적실 뿐”이라고 했다. 그가 화개에서 차를 마셨음을 말하는 부분이고, 좋은 맛을 거부하고 소박 소탈하게 살았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선사는 평소 불교음악인 범패를 잘했는데 그 소리가 곡조를 빗겨서 소리를 날리면 상쾌하고 슬프고 완곡하여, 능히 천상계의 모든 신선과 부처를 기쁘게 하였다. 먼 지방으로 전해져 배우려는 사람들이 마루에 가득 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사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와 빽빽하게 찼는데, 비문에는 ‘벼와 삼처럼 줄을 지어 찾아와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였다. 현세의 권력자인 신라왕보다, 대중스타와 같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선사가 태어났다면, 아마 조용필 급 이상의 탑 가수가 되거나. ‘국보급 가수’란 별칭까지 붙었을 것이다. 왔으면 가는 법이다. 850년 1월 새벽, 문인들에게 “모든 법은 다 공(空)이다. 나는 떠날 것이다. 한 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 형체를 간직하지 말고, 명을 지어 내 행적을 기록치 말라”는 말을 남기고 앉은 채로 돌아가시니, 속세 나이 77세, 승려가 된지 41년째였다. 하지만 후손은 탑을 세웠다. 세우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도 기록이 없는 조상들처럼 묻히고 잊혀 버렸을 것이다. 그러면 쌍계사가 울고, 화개가 울고, 신라가 울었을 것이다. 진감선사는 질박한 성품이었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말을 했다한다. 헌 솜옷이나 삼베옷을 입었고, 겨를 섞은 밥에 나물 반찬 두 가지를 넘지 않은 음식을 먹었다. 귀인과 달인이 찾아와도 반찬은 똑 같았다고 했다. 계속~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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