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하동군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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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21.05.1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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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오리를 날려 절터를 잡고, 눈 속에 칡꽃이 피는 전설의 땅 ‘목압’

진감선사는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신비한 스님이었나 보다. 호랑이의 인도로 화개에 들어왔고, 걸어 지리산의 한 봉우리에 우뚝 선다. 나무로 깎은 오리 세 마리를 팔을 쭉 뻗어 화개골짜기를 향해 날려 보냈다. 퍼덕거린 오리는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길지를 찾아, 3곳에 절터를 찾기 위함이었다. 세 마리 오리는 하늘 높이 날았고, 지금의 용강리와 운수리 지역을 날아다니더니 선사 앞에 와선, 뒤뚱대며 선사를 안내했다. 첫째 오리가 안내한 곳은 지금의 목압마을 이었다. 지금의 목압교 건너 마을회관 왼쪽에 산이 흘러서 멈춘 곳이었다. 화개에서도 가장 따뜻한 곳 중의 한 곳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신라의 삼법화상이 당나라로 들어가 육조혜능대사의 머리를 잘라와 처음으로 모셨다는 곳(추정)이기도 하다. 12월의 한겨울에 눈이 내려도 칡꽃이 피는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가 이곳이라고 말하곤 한다. 두 번째 오리는 지금의 국사암으로 들어갔다. 아늑하고 좋기는 했지만 앞이 막히고 자리가 좁은 단점이 있어, 진감선사는 암자를 짓고 이곳에서 머물며 또 수행을 한다. 세 번째 오리는 남쪽을 보고 볕이 잘 들어 저리도 따뜻한 곳, 지금의 쌍계사 금당이었다. 탁 트여 시원하고, 전망이 기가 막히는 곳이었다. 선사는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아껴두고, 첫 번째 오리가 안내한 곳에 먼저 절을 지었다. 해서 나무오리가 안내해서 지은 절이란 뜻으로 나무목(木), 오리압(鴨)자를 써, 목압사(木鴨寺)란 이름을 지었다. 지금은 사라져 마을이 됐고, 목압사의 흔적만 남아 있다.

-돌덩이 지고 30년, 평생을 눕지 않고 엉덩이에 호랑이를 달고 다닌 집념의 수도승

[조능선사] 조능선사는 돌덩이를 지고 30년을 고행하고, 평생을 눕지 않은 집념의 수행승이었다. 구도를 향한 집념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한 아름 좀 못되는 반질반질한 돌덩이가 있는데, 이 돌이 선사를 성불 시킨 ‘위대한 돌’이라고 한다. 큰 알처럼 생겼고, 손을 하도 타 까칠한 표면이 빛이 난다. 불가에선 유명한 분인데 거의 알려지지가 않았다. 화개에서 차를 음미하며 살고, 한 잔의 화개차를 마시고 입적한 불교계의 거두다. ‘벽송선사’의 제자로, “옛다 도 받아라”로 유명한 ‘벽송선사의 마음을 이은 분’으로 통한다. 선사는 유명한 ‘무(無)자’ 화두를 들고, 터질 때까지 ‘씹고 뱉고 매달리고 담고 비워버린’ 엄청난 인내로 용왕매진했다. 화개 청정수행의 대표격인 수도승이었다. 칠불사 아자방에서 수행하며 하루 한 끼를 먹었고, 발꿈치를 들고 천천히 걷는 ‘교족정진’의 수행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무거운 돌을 지고 쌍계사와 칠불사의 밤길을 30년 넘게 무려 8㎞를 1만 일을 지고 다닌 괴짜스님. 30년 동안 쌍계사와 칠불사까지 매일 8㎞ 이상을 걸었고, 이 거리는 서울~평양 간 261㎞를 300번 이상을 왔다 갔다 한 정도의 거리다. 등에는 돌, 머리와 가슴으로 ‘화두를 씹고, 또 씹으며’ 기어이 성불하고만 불굴의 승려였다. 수행을 하지만 중 팔자, 얼마나 잡념이 많고, 잠은 오는지, 선사는 이런 것 때문에 곧잘 좌절했다. 집중하기 위해, 잠을 쫒기 위해 매일, 칠불사와 쌍계사까지 20리 밤길을 걸어 다녔다던 그였다. 걸어가선 육조혜능이 모셔진 금당에 예불을 드렸다. 잠과 잡념을 쫒으려 했지만 쫓는다는 생각이 잡념이 된 채, 또 하루를 허송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선사는 쌍계사 금당 앞에서 큼지막한 돌덩이를 어깨에 메고, 20리를 왕복했다. 이 돌이 성보박물관에 있는 그 ‘위대한 돌’이다. 돌을 지고,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칠불사와 쌍계사를 오르내리던 어느 날 밤, 선사의 눈앞에 떡 버티고 선 호랑이가 있었다. ‘죽었구나.’ 선사는 몸뚱이를 공양하겠다며, 살을 씹는데 방해가 될 돌을 내리고 기다렸다. 호랑이는 고개를 돌렸고, 살가운 고양이마냥 그의 20리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영물 호랑이는 선사가 지고 있는 돌을 머리로 받치고 뒤따라 다녔다 한다. 어떻게 보면 좀 웃기는 장면이다. 선사의 엉덩이에 호랑이를 달고 다닌 모양이기 때문이다. 돌을 받쳐 든 호랑이의 머리가 선사의 엉덩이에 딱 부딪히는 느낌, 호랑이의 숨소리, 조능선사는 무서워서라도 있는 잠 없는 잠, 다 달아나 버렸을 것이다. 중종 27년(1532) 8월7일, 선사는 칠불사 아자방 수행 중 다리가 갈라져 피를 쏟고 만다. 선사는 ‘필(Feel)’ 받았다. 밤중에 세게 정진하다가 결국 ‘확철대오’했다. ‘도가 터진 거’였고, 탄압으로 맥이 끊어질 것 같던 위태위태한 조선의 선맥이 이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사가 어디서 왔고 누구의 아들인지, 속성이 뭔지도 통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경암집>과 <조선불교통사>에 선사에 대한 짧은 기록이 전해 올 뿐이다. 선사는 유언했다. “사람과 재물을 모아 낭비하지 말고 자갈을 산같이 모아 사리를 봉안하라”고 한 뒤 1545년 12월8일 자정쯤에 입적했다. 선사의 무덤인 부도는 아직도 자갈로 쌓여있다. 뒤에 사람들이 자갈사리탑 대신 돌을 깎아 만든 예쁜 돌종으로 부도를 만들어 바꾸려 했다. 하지만 자갈부도 앞에서 호랑이가 떡 버티고, 부도탑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지키지 않는 유언을 호랑이가 지켰던 것이다. 칠불사에서 더 올라가면 옥보대가 있고, 서북쪽 언덕에 부휴선사의 치아탑이 있다. 부휴선사는 광해군에게 초청돼 법문을 설파하고, 엄청난 감동으로 줬던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부휴선사의 치아탑 아래에 돌로 쌓은 추월 조능선사의 부도가 있다. 쌍계사에서 칠불사로 가는 길 어디든 선사가 수행하지 않은 곳이 없다. 화개를 걷는다는 것은 조능선사가 걸었던 위대한 고행의 길을 걸음이다.

-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가는 불일폭포

[불일폭포] 청학동을 화개사람들은 놀랍게도 ‘불일폭포 부근’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불일폭포가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하고, 불일폭포의 원래 이름이 ‘청학폭포’라고 불렀다며, 여러 기록을 들어 증명해 보이려 한다.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에 불일폭포로 가는 길을 아름답게 소개해 뒀다.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그 제서야 불일암에 도착했는데, 바로 청학동이다.’ 청학동이 불일암이라고 한 부분이 이채롭다. 불일폭포 위쪽을 부처님이 항상 머무는 자리라했고, 아래에서부터 하불 중불 상불이란 세 암자가 있었던 신비의 골짜기이기도 했다. 불일폭포는 쌍계사의 동쪽 삼신봉과 형제봉 중간 지점, 산중턱 3㎞지점에 있다. 길이가 무려 60m, 단연 지리산의 최고이고,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폭포다. 사방이 막혔고, 폭포아래에서 보면 하늘은 동그랗게 보이는데, 최치원이 말한 ‘항아리 속 별천지’를 여기서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물이 떨어지는 폼새는 거의 압도적이다. 오른쪽 어딘가에서 물이 튀어나오다가 왼쪽으로 받쳐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다, 바위에 부딪히고 또 떨어진다. 그리고 또 아래로 떨어진다. 쌍계사 뒤편, 청학이 있던 곳에 승천을 준비하고 있던 용이 있었다. 인고의 세월을 거친 용은 어느 날 꿈틀거렸다. 구름이 잔뜩 낀 날 불일폭포 아래 ‘용추못’에 살던 용은 드디어 승천을 해버린다. 용은 상상의 폭을 뛰어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모양이다. 이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살짝 쳤는데, 산이 쩍 갈라져 두 동강이 나버렸을 정도이니.
이때 만들어진 것이 불일폭포의 서쪽(왼쪽)청학봉과 오른쪽 백학봉이다. 지금의 향로봉과 비로봉이다. 그 사이로 물이 흘러 폭포가 됐는데 이곳이 불일폭포다. <유두류록>에서 남명 조식은 1588년 불일폭포에서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때때로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고 썼다. 남명이 이곳을 다녀가고 40여년 뒤, 1632년 발간된 <진양지>에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무부(무사)가 돌을 던져 청학의 날개를 부러뜨렸더니 한 쪽 날개로 날아 떠나버렸다. 이때부터 청학이 없어졌다고 썼다. 얼마나 무작스런 군인이었든지, 무슨 억한 심정이라고, 신선이 타고 다니는 청학을 돌맹이를 던져, 날개를 부러뜨렸는지, 지어낸 이야기라도 황당하다. 불일폭포의 원 이름은 청학폭포였다.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에서 수행했고, 지눌이 입적하자 왕이 ‘불일보조’란 시호를 내렸다. 이 시호를 따 불일폭포라 했다. 지눌이 수도했던 암자를 불일암이라 부른다. 불일폭포 아래에 ‘용추’와 ‘학연’이란 연못이 있고, 얼마나 깊은 지, 도대체 확인이 되지 않는 곳이다. 이곳 용추의 거대한 용이 승천해 불일폭포를 만들었으니, 그 깊이를 안다는 게 무리다. 어쩌면 알아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용추와 학연의 아래에 천연 바위굴이 있는데, ‘고운 굴’이라 한다. 고운은 최치원의 호다. 최치원이 이 굴속에서 공부하고, 가야산 홍류동(그는 홍류동에서 사라졌다)과 이곳 굴을 통해 왔다 갔다 한단다. 

-어리석은 중아, 먹고 살만하면 됐지, 어째 욕심이 많아 굴을 넓히나

[쌀 바위] 불일암은 진감선사가 창건했고, 수행을 하던 곳이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수행했고, 도량을 중창하기도 했다. 이 불일암에 한 스님이 살았다. 어느 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더니, 폭풍이 휘몰아 쳤다. 용소에서 튀어나온 용이 승천하다 꼬리로 산을 치면서 산이 쩍 갈라져 버렸다. 절벽이 생기고, 폭포수가 쏟아졌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절벽에 큰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그곳에 희한하게 쌀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부처님의 은혜로 쌀이 나왔다고 생각한 스님은 얼마 되지 않는 쌀이지만 부지런히 쌀을 담아 암자로 옮겼다. 다음날도 쌀은 있고, 그 다음날도 쌀이 쌓여 있었다. 스님은 화개장터에 쌀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하루는 화개장 쌀집 아줌마의 “스님요! 가져 올라카모 좀 많이 가져오소. 찔끔찔끔 가져와 갔고, 폼만 재면 되것십니꺼”란 소릴 들었다. 암자로 돌아온 손님은 고민했다. “옳다. 저 쌀 구멍을 더 넓게 팠뿌자. 그라모 쌀이 억수로 쏟아질 기라” 스님은 굴을 넓히기 시작했다. “세배나 넓게 팠으니 세 배는 더 나올 기라.” 다음날, 자루를 들고 절벽으로 내려갔는데, ‘이게 뭐야.’ 쌀이 잔뜩 나와야 하는데, 쌀은 없고, 폭포에서 떨어진 물 몇 방울만 담겨 있는 게 아닌가. 
이솝우화의 ‘황금 알을 낳는 거위’와 비슷한 이야기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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