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동소리] 막대기 숫자로 뽑은 국회의원 198명.
[노년의 고동소리] 막대기 숫자로 뽑은 국회의원 198명.
  • 하동뉴스
  • 승인 2021.05.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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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최초의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이른바 제헌국회의원 선출이었다. 전국을 200개 선거구로 나눠 200명의 국회의원을 뽑기로 했는데, 제주도 선거구 두 개가 공산당 세력의 집요한 방해로 선거가 불가능하여 두 명이 모자라는 198명이 뽑혔다. 만 21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남녀 누구나 선거권이 있었고, 25세 이상인 자는 누구나 국회의원을 하고 싶으면 출마 할 수 있었다. 당시 국민 70% 이상이 글을 모르는 문맹이라 기호를 막대기로 수로 정했다. ‘막대기 하나 김 아무개’ ‘막대기 둘 이 아무개’. 후보자들은 자기를 소개할 때 “안녕 하십니까! 막대기 하나 김 아무개 올씨다. 꼭 막대기 하나 밑에 찍어 주십시요!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전국에 750개의 투표소가 차려졌다.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투표 시간이었다. 투표소 앞에는 아침부터 어린 아기를 들쳐 업은 아녀자들, 지팡이에 짚거나 젊은이의 부축을 받은 노인들까지 길게 늘어섰다. 

 선거가 뭣인지 알 길이 없는 노파들도 뭣 모르고 끌려 나왔다. 단군 이래 최초의 가슴 설레는 선거라 그런지 투표율은 대단히 높았다. 95.5%. 이리하여 나라의 기초를 세울 일꾼들이 선출되었다. 당선자 가운데 최고령자는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 73세 이승만(李承晩), 최연소자는 대동청년당 소속 경북 봉화 선거구 배중혁(裵重赫)으로 27세였다. 평균 연령은 47세. 최다 득표자는 서울 성동구 출신의 이청천(李靑天), 4만 1532표를 얻었다. 이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일본에서 2·8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김도연(金度演)은 한민당 소속으로 서울 서대문구에서 당선됐다. 러시아 공산대학을 졸업한 사회주의 운동가 조봉암(曺奉岩)은 몸담았던 조선공산당과 결별, 인천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여성 최초의 국회의원은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낸 임영신(任永信). 그는 경북 안동을 구에서 당선된 무소속 정현횡(鄭顯橫)이 중도에 사망하니, 1949년 1월의 보궐 선거를 통해 당선, 최초의 여성국회의원이 되었다.
 
 ‘5·10 총선거’는 오로지 이승만 등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으로 유엔의 힘을 빌려 얻어진 외교적 성과였다. 소련의 집요한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의 외교관 메논이 결정적으로 역할을 했다. 유엔 임시조선위원회 의장 메논은 유엔 방송국을 통해 조선은 물론 세계만방에 이렇게 호소하였다. “…5월 첫 주일 이내에 한국에서 가능한 지역 내에서 선거 날짜를 결정해야 한다. 선거법을 작성하고 여론을 환기하며 조절하고 교육하여야 한다. 자유선거를 하는데 모든 장애를 제거하여야 한다. 이는 조선인의 정치수완을 시험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또한 건전한 정치가들의 심정을 타진하는 기간이 될 것이다. 3000만의 운명은 그들에게 달려 있다.” 선거판은 매우 혼잡스러웠다. 그야말로 피투성이 총선거였다. 적색분자들과 단독정부 반대 세력의 방해가 극심했다. 선거사무소 134개소, 관공서 301개소가 습격당했다. 612건의 테러 사건이 빚어져 공무원 15명, 후보자 2명, 경찰관 15명, 양민 107명이 목숨을 잃었다. 민가와 경찰관서, 관공서 103개소가 불탔다.

 우리 하동에서는 강달수(姜達秀)·고종철(高鍾哲)·이상경(李相慶)·황학성(黃學性) 네 후보가 출마, 부산 15구락부라는 사회단체에 몸담았던 진교 출신의 강달수 후보가 1만 7014표를 얻어 당선됐다. 그는 진교면 고이리 출신으로 광복 직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진주지부장으로 활동했다. 하동에서는 활동 이력이 없는 낯선 인물이라 사람들은 그의 당선을 두고 ‘뜻밖에 강달수!’라며 의아해 했다. 차점자는 1만 6502표를 얻은 악양면 출신 이상경(李相慶), 그는 일본대 법과를 나와 하동수리조합 이사,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하동지부장 등을 역임 했다. 강달수는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재출마하였으나 3720표를 얻어, 당선자 이상경이 얻은 8282표의 절반에도 못미처 낙선하였다. 재선에 실패한 강달수는 경충당 유지관리위원, 밀양수리조합장, 하동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는 1948년 5월 31일 오전 10시 20분 개원 회의를 열어 최고 연장자인 이승만을 임시 의장으로 추대,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申翼熙)와 김동원(金東元)을 뽑았다. (사)대한노인회 하동군지회 지회장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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