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군 스토리텔링-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연재] 하동군 스토리텔링-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 하동뉴스
  • 승인 2021.05.2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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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로마 폼페이같이 사라져버린 맥전마을, 이미 예고돼 있었다?

[맥전마을] 화랑수 남쪽에 있는 맥전(麥田)마을은 큰물 즉 홍수와 지진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없어져버린 마을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대 이태리의 폼페이 같은 마을이다. 폼페이가 화산폭발이라면, 맥전마을은 홍수와 지진이었다. 병자년에 닥친 참사였다. 그야말로 마을이 사라져 버렸다. 밀쳐 없어진 동네라고 해, 마을사람들은 ‘미라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병자년은 1936년 3월에 있었던 큰지진이 있었던 해다. 마을이 사라진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여름이었다. 일본이 미워 땅속으로 꺼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초봄에 지진으로 지반이 불안정했고, 여름 홍수에 묻혀버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맥전마을의 맥(麥)이 보리라는 뜻도 있지만, 맥(麥)자가 ‘묻다. 매장하다’는 뜻이 있어, 옛사람 중 누군가가 이런 참사를 예고했다고도 전한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화랑수(花浪水), 그 위에 구름다리, 옆에 이상한 시멘트상(像).

[용강리 화랑수 구름다리] 화개천에 딸랑 하나 놓인 구름다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용강리 화개천에 구름다리를 놓았다. 다리를 가설한 사람들도 먼저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주민들도 맘에 들어 했다고 한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 옆에 위태하게 붙어 모양이 위축돼 버렸지만 처음엔 대단한 명물이었을 것이다. 구름다리가 만들어져 ‘화랑수 마을’의 구름다리는 일약 명소가 됐다. 지금의 화랑교 옆에 쇠줄을 묶어 화랑수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그 구름다리다. 화랑수(花浪水)란 직역을 하면, ‘꽃물결을 이룬 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화랑수마을의 유래는 지금은 없어져버린 범왕리 연동(蓮洞)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 연꽃이 피기 전에 장마가 닥치면 연꽃이 떠내려 와 화랑수마을 앞 화개천에 연꽃이 원을 그리고 머물렀다 떠내려가곤 했다. 이 장면이 하도 아름다워 화랑수(花浪水)란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구름다리 개통식 날, 마을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하는데 구름다리 옆에 전에 없던 시멘트로 만든 신라의 화랑상(花郞像)이 떡 세워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이순신 장군 같이 생기기도 했고, 신라의 화랑같은 장수 모양 같았다”고 했다. 아는 사람들은 웃었다. 박정희 독재 당시 새마을정신은 곧 화랑의 정신으로 통하던 때였다. 화랑수(花浪水)를 신라의 화랑(花郞)으로 해석해 버린 결과였다. 뒤에 당연히 철거됐다. 88년도에 큰 홍수가 나 구름다리가 뒤틀어졌고, 지금처럼 대각선으로 삐딱하게 놓여버렸다.

[소년바위] ‘少年岩(소년암)(소년바위)’는 계원마을과 모암마을의 중간에 있다. 칠불사를 중창할 때 칠불사에 여자 아이처럼 예쁜 동자스님이 있었다. 절을 찾는 사람들 옆에서 함께 소원을 빌어주고, 잠을 아끼면서 부처님께 절을 하곤 했던 어린 스님이었지만 칠불사 중창 일을 돕다가 지쳐 죽어버렸다. 그 동자승을 기념해 바위에 ‘소년 암’이라고 새겼다. 사람들은 이 동자스님을 칠불사에 상주한다는 문수보살이 ‘동자’로 변신해 나타났다고 믿고 있다. 칠불사에 ‘소년부도’가 있다.

-괴짜 스님이 배를 둥둥 두들기고, 꽥꽥 소릴 지르며 화개를 지나고 시를 읊는다.

[대혼자 스님] ‘크고 어둡다’는 뜻의 호를 가진 대혼자(大昏子) 스님이 있었다. 무이스님이라고도 불렀고 대혼자란 호는 자신이 스스로 지어 불렀다. 그는 한국 불교사를 통틀어, 가장 특별한 스님이다. 최고의 기승으로 통한다. 지금으로 치면 상당한 ‘비호감’이었을지 모른다. 대혼자 스님은 지리산에 숨어 살았다. 옷은 누더기 딱 한 벌, 벗지 않고 무려 30년을 지냈다. 항상 겨울이나 여름에는 뭘 하는지 산에 들어가 박혀선 나오지 않았다. 스님의 거처가 화개동천 어디였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치는 않다. 봄가을에 가죽띠를 허리끈 삼아 배에 두르고, 그 배를 둥둥 두드리며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화개동천과 지리산 천지를 떠돌아다녔다. 배 두드리는 장면을 본다면 참 우스웠을 거지만, 뭇 중생을 깨우는 소리였을 것이다.
320㎞로 둘레 약 800여리의 지리산에 있는 화개 칠불암, 국사암 쌍계사 등 70여 암자와 사찰을 찾아다녔고, 하루 세 말 또는 네 말의 밥을 먹어댔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앉은 자세로 열흘이 넘도록 앉았다. 즉 앉았다하면 열흘이고, 먹었다하면 너 말은 거뜬히 먹었다. 철칙이 있었는데, 앉았다 떠날 때는 큰 목소리로 ‘산게’를 읊었다. 산게란 불교의 노래나 시를 뜻한다. 하룻밤을 자는 암자에서는 꼭 1개의 시(산게)를 남겨놓았다. 아마도, 여름 겨울엔 스님들의 여름과 겨울 수행인 하안거와 동안거에 들었을 테고, 앉으면 10일 이상이었다는 것은 참선 삼매에 든 것을 말할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이면서 당시 유명했던 혜심스님이 있었다. 대혼자 스님이 혜심스님을 찾았고, 혜심스님은 ‘크게 어두운 곳에서 잠 이룰까 두렵나니/ 향기로운 차 자주 끓여야지’란 존경과 경외심을 담은 시를 쓰기도 했다.
-도둑, 화개에 20채의 집을 짓고, 경상?전라?충청 3도 절도사를 격파하는데…….

[대도 장영기] 홍길동의 할아비 뻘 되는 조선 대도계의 원조
조선 예종 때. 도둑 장영기는 지리산 화개골짜기에 20여 채의 집을 짓고, 제단까지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대단한 인물이다. 100여명의 패거리를 몰고 다니는 조선 건국 후 처음 등장한 대도(大盜)다. 역사에 기록된 조선 대도의 계보는 1470년대 화개 장영기로부터 시작한다. 1489년 김막동, 1500년에 홍길동, 1530년경의 순석, 1560년경의 임꺽정 등이다. 허구로 알려졌지만 홍길동을 비롯해 장영기 등의 도둑들은 조선왕조실록에 생생하게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다. 기록엔 무려 6개월간 장영기는 만나는 사람을 그냥 찔러 죽이고, 분탕질에 납치 노략질까지 하는 천하흉악범으로 묘사돼 있다. 대담하기도 해 화개에 있다가 진주로 들어와선 ‘부하 수 십 명을 거느리고 진주목사 아내의 행차로 가장해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고도 했다. 예종은 14개월을 왕위에 있었고 20세에 급사했다. 장영기는 예종 재위 절반가량을 애를 먹인 극과 극의 인간이었다. 오죽했으면, 예종이 ‘반드시 죽이고 소탕하라’는 특별명까지 내렸겠나. 포상으로 3등급 특진까지 보장했다. 장영기의 본부는 지리산 보리암이었고, 지금의 화개면 모암마을이다. 근처에 신흥사가 있었고, 모암마을의 지형을 이용해 관군을 막았고, 죽고 살기로 싸웠다. 구례현감이 토벌군을 이끌고 장영기를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경상우도 병사 이극균이 화개동 어구(신흥사)에 진을 쳤지만 조금 싸우는가 싶더니, 북소리 돌 구르는 소리, 함성에 놀라 도망가기 바빴다. 기록대로라면 장영기는 싸울 땐 무서울 정도로 밀어붙이고, 도망갈 땐 ‘말 14필을 두고 떠났다’는 기록처럼, 모조리 내팽개치고 도망쳐 버렸다. 그의 아내도 여장부였는데, ‘도둑의 부인이 북을 치면서 독전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1차 싸움에서 경상, 전라에서 온 토벌군은 ‘양식이 떨어진 걸’ 빌미로, 그냥 허무하게 철수하고 만다. 실상 겁먹고 도망친 거였다. 영호남에 기라성 같은 병권을 쥔 자들이 3등급 특진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지만 장영기는 건재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전라도병마절도사 허종(許琮)이었다. 그도 토벌군을 편성했다. 실록의 장영기 부분에서 허종이 나오는데, 첫 기록은 최악의 장수로 평가돼 있다. “절도사 허종이 겁을 먹고 장영기를 제압하지 못했다. 장영기를 범과 같이 두려워했다.” 하지만 다른 기록엔 왕의 총애를 받는 최고의 지략가란 것이 곳곳에 적혀있다. 갑자기 허종은 장영기의 극적인 라이벌로, 등장한다. 쫒고 쫒기는 관계, 한 명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도사고, 한 명은 도적이다. 허종은 장영기를 압박해 들어가고, 열세인 장영기는 지리산을 떠나 광주 무등산으로 떠난다. 허종이 첩보를 입수하고 ‘지략가답게’ 지리산 곳곳에 복병을 배치한다. 하지만 장영기는 허종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남쪽 바다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조선 최고의 지략가의 허를 찌른 장영기의 묘수였다. 이동하면서 장영기는 관군과의 또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허종은 열받았다. 진열을 정비하고, 대대적 반격에 나선다. 전남 장흥에서 결전이 벌어지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 시작된다. 기습과 지형을 이용하지 못한 장영기는 정규군과의 싸움에선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관군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된다. “탐관오리의 재물을 빌려,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먹인 죄가 있다. 욕보이지 말고, 죽여라.” 허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영기를 압송하고 얼마 후 허종은 병조판서로 제수된다. 살아남은 무리들은 전라도 섬으로 도망쳐 해적이 된다. 이들은 뱃머리에 칼을 꽂고 ‘거도선이라 부르며 노략질을 했다. 역시 의적이었고, 한때 전라도와 충청도의 바다를 재패하는 대해적이 되기도 했다. 예종이 급사하고, 장영기는 사형에 처해졌다. 전라도관찰사 오응이 장영기를 사로잡은 허종에게 글로써 명했다.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장영기의 목을 잘라 걸고, 시체를 8도에 돌리라.”

- 활빈당 홍길동은 화개에서 ‘장영기’의 이름을 표절(?)했다.

[홍길동=장영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홍길동은 바로 그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는 도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장영기와 홍길동을 ‘흉악한 도둑놈’으로 그려놓았다. 하지만 후대의 평가는 홍길동은 의적, 장영기는 기록된 대로 잔악한 강도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젊은 날 홍길동은 지리산 화개에 근거지를 튼다. 이런 홍길동이 화개에 들어온 뒤 이상하게도 장영기(張永己)란 이름으로 바꿔버린다. 왜 장영기로 바꿨을까. 장영기로 이름을 바꾼 홍길동은 화개에서 전국 팔도에 정보원(첩자)을 파견하고 민심을 파악했다고 기록돼 있다. 탐관오리와 토호가 벌벌 떠는 의적 홍길동이, 천하의 못된 놈으로, 분탕과 납치를 일삼던 장영기의 이름을 별명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아주 이상하다. 홍길동은 정영기란 이름을 빌어, 주민들을 벌벌 떨게 하고 최고의 악인으로 위협을 주고자 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화개에서 또는 민중 사이에서 장영기는 ‘의적’으로 통했기 때문에 홍길동은 그의 이름을 빌린 것이 분명해 뵌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고, 도적의 무리는 반체제적 인사였으므로 실록에서 ‘의적’ 따위로 평가절상하는 경우는 아예 없다. 그런 느낌을 주는 단어라곤 ‘장영기(또는 홍길동)는 특이한 점이 있어’ 정도로 기술했을 뿐이다. 홍길동은 ‘의적’인 장영기의 이름을 빌렸던 것이다. ‘홍길동=장영기’란 등식, 홍길동은 의적 장영기를 표절(?)했고, 장영기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장영기는 타락한 조정과 관리, 부패한 토호를 벌주던 홍길동과 임꺽정으로 계보를 만든 조선의 원조 의적, 대도였던 것이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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