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스토리텔링
[연재]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스토리텔링
  • 하동뉴스
  • 승인 2021.07.27 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발 차 좀 보내주시오’ 체면이고 뭐고, 애걸복걸 차를 구한 정약용의 애교

화개에서 차를 마실 때, 다산의 말은 약이 된다. 다산 정약용의 이미지는 점잖은 학자풍의 얼굴이고, <목민심서>를 쓴 저술가요. 왕의 총애를 받은 충성스런 신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차를 좋아했던 정약용은 차 앞에선 좀 달랐다. 전남 강진(다산 초당)에서 유배지 생활을 하다 만난 혜장스님께 쓴 <걸명소>란 편지다. ‘제가 요즘 차를 탐하여 차를 약으로 마시고 있소. 육우가 쓴 <다경> 삼편을 통달했고, 병든 이 몸은 누에처럼 중국의 노동이란 사람이 말한 일곱 잔의 차를 모두 다 마셔버렸소…. 이제 제가 채신의 병에 걸려 차를 구하고자 걸명(제사 끝에 잡귀에 주기 위하여 음식을 조금씩 뗀 것)의 뜻을 전합니다….’ 다음이 재미있다. ‘듣건대 불자는 시주(베푼다는 뜻)를 중히 여긴다 했소. 명산의 차를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제발 차 좀 보내주소.’ 다산초당 뒤쪽으로 오솔길을 통해 걷다보면, 멀지만 혜장스님이 있던 백련사가 있다. 애교스럽고, 구차하지만 이 체면의 시대에 이런 편지를 썼다는 건 여간 친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글일 거다. 이 편지 중 빠진 부분이 있는데, 정약용은 ‘차 맛이 나는 시간’을 이렇게 적었다. ‘...이른 아침 안개가 피어날 때, 뜬 구름이 맑은 하늘에 두둥실 떠다닐 때, 낮잠에서 갓 깨어났을 때, 밝은 달이 푸른 골짜기에 드리워 흩어질 때, 이때 마시는 차는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라고 했다.

화개 칠불사 초의선사는 차를 설명할 때 정약용의 이 구절을 인용하곤 했다.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 혜장스님에게 그렇게 차를 보내달라던, 혜장선사가 있었던 백련사에서 만난다. 한 명은 차의 성인이라 일컫고, 한 명은 차에 빠져버린 선비였다. 한편 정약용의 애교 있고, 절절한 ‘제발 차 좀 보내 달라’는 글을 받은 혜장선사는 차가 떨어지면 먹으려 아끼고 아낀 ‘비상 차’를 정약용에게 줘 버린다. “썩을 놈의 서생”하고, 껄껄 웃으면서. 정약용은 어떻게나 차를 좋아했던지 귀양살이를 하며 ‘여유당’이란 호 대신, ‘다산’이란 아호를 바꿔 버릴 정도였다. 다산은 뒤에 <동다기東茶記>를 썼고, 귀양이 풀린 뒤에는 그의 제자들과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종의 친목계인 ‘다신계’까지 조직하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은 젊은날 화개장터를 찾고, ‘화개장터’ 시까지 남겼다. ‘따사로운 백사장에 막 장이 서니/부엌마다 연기나고 술고기 벌렸네…포군엔 돛단배들이 엮은 듯 총총하고/…/중국 비단이 들어오고/울릉 탐라 생선이 이곳으로 왔네…/란 시다.  화개에서 차를 마실 때, 정약용의 ‘걸명소’ 한 자락을 읊으면, 행여 ‘걸명소’를 아는 찻집 주인이 숨겨놓은 보물같은 ‘비상차’를 공짜로 내밀지도 모른다. 왜냐고? 화개는 꽃이니까. 꽃 같은 사람들이 설마 안줄까.

-1000년 만년을 버티고 선 바위에 해석이 안 되는 암호문 넉자,

[의신 암호문 바위] 서산대사 정녕 쿠데타(역성혁명)를 꿈꿨나.

읽을 수 없는 글자 4자를 가슴에 박고 1000년 만년을 버티고 선바위. 화개 단천에 있다. 바위에게 뜻을 물었지만 대답은 없다. 직삼각형으로 탑처럼 오뚝 선 바위는 주위를 압도하고, 사람을 잡아끄는 힘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맞은편 암벽도 볼만하다. 무너질 듯 위태하지만 견고하고 단단하다. 큰길에서 단천으로 빠진다. 박달나무가 많아 단천이라고 하는데, 단천 단풍이 또 사람을 미치게 한단다. 이 단천 한 가운데 사람 몇 길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았다.
바위 중간쯤에 칼로 갈라놓은 듯 위 아래로 쫙 갈라진 흔적이 있다. 포장도로에서 내려 보이는 위치, 차라리 올려다보는 위치에 길이 있었으면, 이 신비한 바위의 위압감과 신비함은 배가 되었을 텐데…. 이 바위에 쓰인 4글자, 해석이 어려운 글이다. 의견이 분분할 뿐 결정적인 해석을 내놓은 사람은 드물다시피 하다. 바위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가 새겼는지도 알 수 없다. 글자 중 전(全) 최(崔)는 비슷해 읽히고 뜻도 풀이되지만, 오(吳) 명(命)자는 옥편에 나오는 글자가 결코 아니다. 이 바위를 이르러 화개사람들은 최치원의 ‘득선처’라고 한다. 최치원이 이 바위에 넉자의 글을 적고, “이를 해석하는 이, 내가 신선이 됐음을 알리라”라고 했다는데, 해석하는 사람이 아직 없었는지 최치원이 ‘죽었다. 신선이 됐다’는 말꼬리만 늘어지고 있을 뿐이다. 단천 암호바위에 적힌 글자다.

지난 2006년께. 경상대학교 손병욱 교수가 이 바위를 야심차게 해석했던 적이 있다. 책으로 나왔는데 ‘서산, 조선을 뒤엎으려 하다’는 제목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이 암호문을 먼저 해석했다는데 의미가 있고 그럴 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손 교수는 이 글자를 해체하고 풀어, 먼저 두 가지로 해석했다. 해석의 방식은 ①.  글자를 인(人)+왕(王)자로 풀고, ②.  글자를 풀면 산(山)+인(人)+왕(王)으로 푼 뒤, 이를 적절히 합쳐, 선(仙)+왕(王)으로 봤다. ③.  글자를 ‘흥(興)’+천(天)으로 풀었다. ④.  글자를 ‘명(命)’으로 봤다. 이를 전체로 보면 4자가 아닌 ‘인왕(人王) 선왕(仙王) 흥천명(興天命)’ 7글자를 만들고 풀어쓰고 이를 다시 의미를 부여해 해석했다.

첫째, 인왕(人王)이면서 선왕(仙王)인 단군이 천명(天命)을 흥(興)하게 했다. 둘째, 인왕이면서 선왕인 단군이 천명을 중흥 시킬 것이다.라고 봤다. 결국 이를 더 구체적으로 풀어 ‘전주 최 씨란 성을 가지고, 흥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과거 단군을 본받아 자기 시대의 단군이 돼, 앞으로 천명을 중흥시키고 말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암호문 해석 등으로 ‘드러난 것을 미뤄 상식적인 판단을 했다’고 그는 적었다. 그렇다면 최흥명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손 교수는 놀랍게도 임진왜란 때 승군을 창설한 휴정 ‘서산대사’라고 봤다. 서산대사가 화개에 18년을 있었다는 점, 서산대사의 속성이 전주 최 씨라는 점과 화개를 떠나 묘향산에 간 후에 남긴 시를 통해 그는 단군의식이 깊이 박혀 있는 사람이었고, 평소에 세상을 바꾸려 했음을 알리는 시들과 문집을 여러 개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서산은 천명을 중흥시키기 위해 자신을 미래의 단군으로 자부했고, 이 결의를 바위에 새겼다는 것이다. 서산대사는 조선조에 스님들이 만든 반체제 비밀결사조직인 ‘땡초’라고 부르는 ‘당취(黨무리당 聚모일취)’를 결성했고, 이 당취를 이용해, 천명을 중흥시키고자 했다. 즉 서산대사는 땡초를 이끌고 ‘조선을 뒤엎는 역성혁명,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또 암호문의 4글자 중 앞의 두 글자 全崔에는 6명의 당취의 성이 들어있는데, 전(全)씨 왕(王)씨 최(崔)씨 임(任)씨, 그리고 박(朴)씨 내지, 백(白)씨라 했다. 최 씨는 서산대사 자신이고, 나머지는 그와 함께 승군을 이끌었던 사람들을 말한다. 임씨는 사명당대사, 박 씨는 의병장 영규, 처영은 왕 씨 일 것으로 추정한다. 서산대사는 자신과 5명의 당취와 함께 이곳 단천에서 글자를 새기고, 3년 뒤 결의할 것을 맹세한다. 이 바위의 아래쪽 제일 밑 부분에 ‘삼(三)’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이 3년 뒤를 뜻하는 글자란 것이다. 과연 서산대사가 쿠데타(역성혁명)를 꿈꾸었을까.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서산의 시 한편…. 天地豈能籠大用 천지가 어찌 큰쓰임을 다 가두리요 鬼神無處覓玄機 귀신도 심오한 도리를 찾을 길 없네 誰知一衲千瘡裏 누가 아는가 천 갈래 헤어진 한 벌 누더기 속에 三足金烏半夜飛 세 발의 금까마귀가 밤중에 나는 줄을. ―금강산 미륵봉에서 우연히 읊음. 하지만 명종의 죽음과 선조의 즉위로 인한 여러 가지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이런 쿠데타의 결의는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서산대사가 준비한 당취 조직의 무력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조선사회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됐다고 손 교수는 봤다.

-관서의 천재 최여신(서산대사) 과거에 낙방, 내친김에 화개에 들고

[영원한 화개인, 서산대사의 생애] 서산의 속성은 전주 완산 최씨, 이름은 여신이다. 법명은 휴정이다. 고향은 평안도 안주다. 조선 중종 때 평안도 안주 땅에 최여신이란 자가 살았는데 14살 밖에 안 된 이 사람을 두고, 동네에선 “신동이다 천재다”하며, 마구 칭찬을 해댔다. ‘글발 날리는’ 날들이었다. 이 최여신이 어느 날 읍에 나와 진사시험을 봤는데, 과연 몇 등했을까. 장원급제인지 알았는데, 아 글쎄, 차석도 아니고, 낙방이었다. 관서의 천재, 그 빛나는 이름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니, 동네에서 굉장히 ‘쪽팔리게’ 됐는데…. 최여신이 얼마나 좌절했는지, 14살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1~2학년인 이놈이, 허구헌 날 ‘술에 절어 인사불성이고, ‘여자다’ ‘죽고 싶다’며, 기생집을 찾았다. 하루는 작정을 하고, 이리 사느니. 죽자’며, 지리산에 들었다. 지리산에 들어 한 스님을 만나고 툭 던지는 말이 어떻게나 싸가지 없는지. “이봐 중, 나를 위해 경이나 읊어 줘 봐.” 아무리 억불시대이고, 스님들이 핍박받고 때려죽여도 괜찮았던 시절이지만 새파랗게 어린놈이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스님에게 말하는 꼴이라곤. 이 스님이 몇 마디 하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 자기가 모시는 숭인선사에게 데려갔다. 최여신이 노승을 보자, 노승의 기발에 좀 기가 죽었다. “스님, 도나 좀 가르쳐 주소” ‘하, 이놈 봐라’ 싶었던 숭인선사도, 하도 어이가 없어 뚱하니 쳐다보고는 대뜸 하는 말. “도를 가져오너라. 가르쳐 주마.” ‘도가 있어야 가져오지.’ 충격을 받은 최여신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가 뭔지 모르겠는데…. 거리를 헤매다가 다시 노승을 찾아갔다. 선사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최여신을 노려보곤, 내리꽂듯 말을 던졌다. “세상의 명리를 구하겠느냐. 대자유인이 되겠느냐.” “법명은 ‘휴정’으로 하라.” 그것으로 끝이었다. ‘고요하게 좀 쉬어라’는 뜻의 ‘휴정(休靜)’이었다. 관서의 천재라는 타이틀에 얼마나 크게 상처를 받았으면, 얼마나 괴로웠으면, 죽기를 작정하고 지리산을 찾았을까. 센스 있는 큰스님은 또 ‘휴정’이란 얼마나 멋진 이름을 지었는가. 숭인(崇仁)은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도 불리는 스님이었다. 불교가 핍박받던 시절 조선 불교의 맥을 실낱같은 희망으로 이어온 스님이었다. 그의 스승은 벽송지엄이고, 벽송의 스승은 정심선사다.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서산대사의 아버지 최세창은 술을 무척 좋아했고, 부인 사랑이 남다른 애처가였다. 그의 모친까지 술을 좋아해, 아버지와 함께 늘 취했다한다. 나라에서 벼슬이라도 내리면, ‘정든 산, 희뿌연 달과 한 병의 막걸리, 아내의 즐거운 마음이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오’하면서 멋들어진 시 한 수를 읊으며, 거절했다 한다. 어머니는 ‘다정한 친척이나 친한 벗을 보거든 내 집이 가난하다고 박정하게 대하지 마오. 저의 치마라도 잡히겠으니….’ 이 금슬 좋은 부부가 50에 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서산(최여신)이다. 서산이 9살 10살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셨다. 14세에 그는 지방 진사시험에 낙방해 버린다. 이때 스승이 전라도 땅에 고을 원님으로 가게 되고, 친구 몇과 스승을 찾아갔지만 스승이 우환을 당해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그야말로 허빵을 친 거였다. 내친김에 지리산을 둘러보기로 하고,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왔다. 그렇게 반년을 실컷 놀아버렸다. 한 암자에서 ‘숭인스님’을 만나 ‘마음을 돌려 세상 명리를 끊고 고통을 떠나라. 글 읽는 이는 노력해도 백 년 동안 소득은 헛된 이름뿐이다’는 말에 출가를 결심한다. 지리산 화개로 들어와 삼철굴암에서 3년, 대승암에서 2년 등 지리산에서 도를 닦고 또 닦았다. 그는 진정한 화개사람이기도 했다. 37세에 승직의 최고 벼슬인 선교양종판사가 됐다. 그는 한숨 쉬었다. ‘세상 명리를 끊고 고통을 떠나라’라는 말을 듣고 출가했는데 ‘벼슬’을 살고 있는 자신을 본 것‘이다. 1년 뒤 서산은 “아이고, 눈병이 들었소”하고,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 등을 떠돌다가 39세에 화개로 다시 돌아온다. 화개로 돌아온 서산은 세상 명리를 구한 자신을 채찍질 하고 뉘우친다. 이때 쓴 시가 ‘…수행승의 선종판사란 벼슬을, 이름에서 어찌 씻을꼬’란 애통의 시다. 돌아온 서산은 옛 신흥사(왕성분교) 위쪽에 폐허가 된 신라의 고찰 ‘내은적암’을, 3칸짜리 방이 있는 암자로 다시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청허원’이란 이름을 붙인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모든 사상을 담을 <선가귀감>을 저술한다.

‘청허원’에서 3년을 살며, 화개천 물로 찻물을 끓여 화개차를 마셨고, 차시를 쓰기도 했다. 이런 그의 흔적 때문에 요즘 이 내은적암을 복원하자는 목소리가 화개에서 종종 들리곤 한다. 이후 화개동 능인(지금의 대성)과 칠불암 등에서 수년을 보내면서, 각고의 노력 끝에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쓰고 목판 인쇄를 준비하게 된다. 서문에 그는 ‘이 글을 스승으로 삼아 묘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석가모니가 나타날 것’이라고 적기도 했다. 하지만 창녕의 젊은 ‘꼴통’ 유생, 성여신이 산청군 단성면 단속사에서 이 목판을 불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삼가귀감>은 판각을 하지 못했다. 오늘날 폐사지가 된 단속사도 정유재란에 불탔다고 하지만 이쪽 민간에선 단속사에 있던 선비들이 불을 지른 것으로 의심한다. 성여신은 그 의심의 한 복판에 있다. 이 시기 불교 탄압은 극에 달했던 시기다. 12세의 문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대리청정을 하던 때였다.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는 과거의 승과를 부활하고 선교양종을 복원했다. 보우대사를 선교판사란 벼슬에 앉히고, 불교를 중흥시키려 했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죽자, 불교는 이성이 마비된 듯 한 유림의 탄압을 받는다. 보우대사를, 죽이라는 상소만 1100여건, 보우대사는 결국 제주도 유배 갔고, 제주목사 변협이 몽둥이로 때려죽여 버린다. 조선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나라였다. 삼가귀감이 불탄 것은 보우대사가 죽고 1년 뒤였다. 엄청난 종교 탄압이 있었던 시기였다. 성여신의 행패에 절망한 서산은 지리산 화개를 버리고, 묘향산으로 가버린다. 청허란 호도 이때부터 버리고, 서산으로 살기 시작한다. 정여립 역모사건 때 죄 없이 옥에 갇히고, 이때 임금선조와 시를 주고받는 인연이 된다. 왕실에선 불교를 믿었고, 사대부는 멸시할 때였다. 추문을 했는데 그의 저서엔 ‘임금을 축복하는 내용 뿐’이라 선조가 옥에 가둔 것이 미안해, 즉각 석방하고, 대(竹) 그림 한 장을 하사한다. 이때가 73세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는 선조를 찾고, 선조는 “그대가 나라를 구제해 달라”는 말을 듣는다. 이후 서산은 각 절에 ‘격서’썼다. ‘…나랏님의 부름을 내가 받았다. 승병의 총책임을 내가 맡았다…. 생사를 초월한다는 공부를 했으니, 겁날 게 무어냐, 혈혈단신에 걸릴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게 무어냐. 불보살의 가호가 있음이라….’ 승병을 모집해 승군을 창설하고, 평양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런 이유로 서산대사는 국사교과서에 까지 등장하고, 난세의 영웅으로 강렬하게 각인된다. 조선의 ‘호국불교’라는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 낸 주인공도 서산대사다. 이후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왔고, 1000여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금강산과 묘향산을 돌아다니며 수행했다. 세속 나이 85세. 앉은 채 입적했다. 서산대사는 호국불교로 이미지화된 스님만은 아니었다.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대단한 선지식으로 조선 불교의 명맥을 잇고, 꺼져가는 불교의 맥을 잇는 불교사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스님이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