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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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뉴스
  • 승인 2021.08.1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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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 차 한 잔을 마시고 앉은 채로 입적한 스님, 그의 멋진 도 깨닫기

[벽송지엄선사] 불교가 처참하게 유린되던 시기, 정심선사는 속인 복장을 하고 첩까지 두고, 황악산 직지사에 숨어 살았다. 한 젊은 스님이 간절히 도를 구하고자 물어물어, 그를 찾아왔다. 젊은 스님은 전라도 부안 출신의 덩치가 크고, 골격이 특이하게 생긴 ‘벽송’이란 스님이었다. 28세에 군대에 들어가 ‘화개 도적 장영기를 토벌할 때 소개된’ 도원수 허종(許琮)을 따라 참전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남북으로 치달리며, 비록 전쟁의 작은 공은 얻었지만, 헛된 이름일 뿐이다”며, 끝내 머리를 깎고 출가 했다. 이 패기만만한 젊은 스님은 속인도 중도 아닌 것 같은, 애매한 정심선사를 찾았다. 큰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란 말만 믿고서, 머리까지 치렁치렁한 정심스님 앞에 섰다. “도를 깨치러 왔습니다.” “나는 도(道) 같은 건 안가지고 있는데…. 근데 도가 깨지남?”하곤 뚱하니 벽송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벽송은 기가 막혔다. 딱히 갈 데도 없고, 도가 높다는 말을 들었으니, 믿고 머무르기로 했다. 벽송은 토굴 하나를 짓고 거기에 눌러앉았다. 정심선사의 절은 가난했다. 도 깊다는 정심선사는 날마다 나무를 해다 팔며 근근이 먹고 사는 산 속의 촌놈쯤으로 보였다. 정심선사가 하는 일이라곤 나무를 해 장에 내다 파는 것이었고, 벽송도 그냥 있기 뭐해, 따라 나무를 해 팔면서 살게 됐다. ‘그래도 큰스님이라는데, 뭔가 있겠지’하면서, 묻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오늘은 바쁜디. 다음에.” “부처는 뭐고, 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무해야 하는디.” 그리곤 “이놈아 먹고 살아야 혀. 바쁘니. 내일 말해 주끄마.” ‘내일’이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한 달 되고, 한 달이 무려 3년이 돼버렸다. 도에 대한 물음과 답에 대한 갈망은 금방 터질 듯 풍선만큼 부풀었지만 끝내 터지질 않았다. “도를 배우러 왔는데 머슴만 3년이요. 땡중이 아니면 한 마디라도 가르쳐줘야 될 게 아냐. 뭘 배운 게 있어야지. 나는 가요. 이놈의 첩질 땡중아.” 쌍욕을 하며, 걸망을 지고 토굴 밖을 씩씩 거리며 나가고 있었다. “그놈 참, 성질하곤….” ‘피~ 웃던’ 정심선사는 ‘떠나는 마당에 이판사판 볼 것 있냐’는 듯 벽송의 뒤통수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무식한 노무 중놈아, 그렇고롬 겔카 줬는디, 우찌 그리 모르노. 문디 자슥아, 자다 일어나모 겔카주고, 나무할 때 겔카주고, 물을 때마다 가르쳐 줬는디…. 이 무식한 자슥아, 도가 오데 있노. 있다쿠모 그게 번뇌지”하고 뒷꼭지가 터져버리란 듯 삿대짓을 해대며, 지랄염병을 떨었다. 벽송은 순간, 얼은 듯 우뚝 서버렸다. 돌아보는 그때, 정심선사가 손으로 뭔가를 휙 던지는 것 같았다. “옛다. 도 받아라.” 벽송은 순간 ‘확철대오’했다. 도가 터져 버린 거였다. 벽송스님은 지리산 화개동 지금의 의신에 있었다는 ‘의신사’에 있었고, 화개 수국암에서 입적했다. 하지만 의신사 일대에 수국암을 아는 이는 보지 못했다.
의신사가 없어진 뒤 벽송선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쌍계사로 옮겨졌다. “옛다. 도 받아라”는, 차마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한명의 부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풍선처럼 부풀어만 간 의문을 스승이 툭 건드리자마자 터져버린 찰나의 순간이었다. 멋진 스승에, 터질듯 도를 갈구한 훌륭한 제자였다. 그들이 살았던 때는 불상을 파괴하고, 사찰을 마구간으로 만들고, 승려를 환속시켜 사냥 몰이꾼으로 삼는 등 불교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던 연산군 때였다. 불교존폐 위기의 시대에, 한국 불교 선종의 법맥이 정심선사에게서, 벽송스님으로 이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이 법맥은 부용영관스님(숭인)→서산대사→소요선사 등으로 흘러간다. 벽송선사의 성불은 하동 화개가 조선 불교의 중심이 됨을 이르는 깨우침이었고, 풍전등화의 조선 불교는 화개에서 잔뜩 움츠렸다가 서산대사란 거목을 만나면서 4개의 지파로 갈라져 뜨겁게 타오르게 된다. 조선후기의 경허선사 등으로 이어지다가 오늘에 이른다.

-벽송, 화개의 차로 살고 화개의 차와 함께 사라졌다

벽송스님은 화개의 차승이고, 화개 사람이기도 했다. 화개차와 같이 열반(죽음)에 이른 도 높은 선승이다. 그의 열반송에도 ‘조주문을 출입했네’란 말이 있다. 조주문이란 ‘끽다거(차나 들어라)란 말로, 도와 차를 비유한 유명한 스님, 조주의 깨우침을 이르는 말이다. 1534년 겨울, 벽송스님은 지리산 화개동 의신사 부근으로 추정하는 ‘수국암’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하다 “…너희들은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고 마음 깨치기를 힘써라”라고 한 뒤, 차 한 잔을 마신 뒤 문을 닫게 했다. 얼마 후 제자들이 문을 열었더니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죽음을 맞았다. 장엄한 죽음이었다.

-범왕사지엔 상사화 군락, 7명의 왕자가 성불을 기념해 지은 범왕사는 절터만 남고

[범왕마을] 멀고먼 길이었다. 김수로왕이 7왕자를 보기 위해 뱃길과 산길을 합쳐 수백 km를 왔다. 인도에서 온 왕후를 만나 10왕자를 얻은 복도 복이지만, 끝내 7왕자가 성불을 했다는 소식은 김수로왕의 가문을 위해서도 경사 중의 경사였다. 그는 성불한 아들 7왕자를 보기위해 드디어 범왕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머물러 이곳의 지명이 범왕마을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범왕은 김수로왕이 머물렀던 곳에 범왕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이라고 한다. 범왕의 ‘범(梵)’은 인도어로 ‘부처’를 뜻하므로, 김수로왕이 머물러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7왕자가 성불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란 것이다. 7왕자가 부처란 뜻의 ‘범’이기 때문에 ‘7왕자가 부처가 됐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원래 범왕은 ‘범왕(梵王)’인데 1914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지금과 같이 바뀐 것 같다고 화개면지에 적혀있다. 현재의 범왕(凡旺)이란 뜻은 ‘고만 고만하게 왕성한 마을’이란 뜻이란다. 어쨌든 아들을 찾으러 온 아버지의 마음이 깃든 곳이 이곳 범왕이다. 이 범왕마을의 범왕교를 북쪽 골짜기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범왕사 옛 절터가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돌을 쌓고, 축을 만든 흔적과 평평한 평평바위가 있다. 이 범왕사지 주위엔 상사화 군락이 있다. 상사화는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는 꽃이 피지 않아, 꽃은 잎을 생각하고 잎은 꽃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7왕자가 일을 냈다. 모두 부처가 되고, 큰소리로 껄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는데

[칠불사 7왕자의 성불] 칠불사는 2000년을 가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옛 이름이 운상원이다. 옛날부터 이곳 인근에는 4~50리에 걸쳐 녹차가 즐비했던 곳이다. 산줄기로 감싸여 있는 땅, 높은 곳이지만 북풍한설을 다 피할 수 있는 길지다. 칠불사는 가야의 김수로왕 아들 7왕자가 이곳에서 득도하고, 부처가 되면서부터 이 이름이 붙었다. 김수로왕에게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과의 사이에 10왕자와 공주 2명을 두었고, 첫째 ‘거등’은 왕위를 잇게 했다. 둘째와 셋째는 허황옥의 성씨를 따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7명은 허황옥의 오빠, 왕자들의 외삼촌인 보옥장유화상과 함께 이곳 칠불사로 들어왔다. 딸들은 기록에 없다. 아마 시집갔을 것이다. 이들은 운상원이란 허름한 초막을 짓고, 운상원 등 너머에 바위굴을 ‘토굴’삼아 2년간을 수행했다. 서기 103년 운명의 8월15일 휘영청 보름달이 밝았다. 보름달을 구경하던 중 한 왕자가 말했다. “푸른 하늘 삼경의 달이 명랑하게 심담을 비춰주네.” 다른 왕자가 받았다. “달은 중추를 맞아 제대로 차고, 바람은 8월에야 더욱 시원하다.” 또 다른 왕자는 땅에 ‘우주 만유의 본원 또는 막힘이 없는 법’을 상징한 일원상인 동그라미를 그린 뒤 발로 뭉개버렸다. 나머지 4명은 말할 것도 행동할 것도 없다는 듯 머리를 숙이고만 있었다. 이때 보옥화상이 지팡이로 힘껏 땅을 내려치자, 칠왕자는 손뼉을 치고 “푸하하하”하고 일제히 크게 웃는 거였다. 달은 휘영청 떴다. 감격적인 7왕자의 성불 순간이었다. 이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웃음은 깨달은 것을 표현한 불교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표현인 것이다. 그것도 7명이 한꺼번에, 가야의 복이었고, 삼한의 복이었다. 한꺼번에 그것도 한 자리에서 일곱명의 부처가 났다고 해, 칠불사가 됐고, 이 절을 ‘동국제일선원’이라고 했다. 동국 즉 한국에서 최고의 절이란 뜻으로, 일주문 지나 칠불사 입구에 ‘동국제일선원’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지질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 ‘순도’가 전래했다고 하지만 칠불사 성불은 103년으로 269년을 앞선다. 또 허황옥이 보옥화상과 인도에서 들어온 지가 최소 10년 이상은 되므로, 한국의 불교 전래는 더 앞당겨 진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불교의 남방 전래설은 김해에서 시작되고, 칠불사에서 꽃을 피운다. 달마대사가 서기 500년대 중국으로 온 것보다 훨씬 이전이다. 아마도 남방의 불교가 전해졌다면 7왕자는 이야기 속의 선문답보다는 부처님이 행했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위빠사나’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수행법’으로, 숨을 쉬면 숨을 쉬는 것을 알아채고, 앉으면 앉는 것을, 서면서는 것을 걸으면 걷는 것을 알아채면서 늘 깨어 있는 것이다. 끝없이 알아채면, 나도 너도 없어지고, 끝내 성불한다고 한다. 글/하동군·한국국제대학교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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