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 하동뉴스
  • 승인 2021.08.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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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제1장: 낳아주되 갖지 않는다
제2장: 성인께는 정해 둔 마음이 없다
제3장: 경솔함은 곧장 뿌리를 잃는다
제4장: 제 태어난 바를 싫어하지 말라
제5장: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이 없다

-군자는 왼쪽을 소중히 한다
君子居則貴左 군자거즉귀자라

君子居則貴左(군자거즉귀좌)
用兵則貴右(용병즉귀우)
兵者不祥之器(병자불상지기)
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

군자는 살아가면서 곧 왼쪽을 소중히 한다. 병장기를 쓰면 곧 오른쪽을 소중히 한다. 병장기라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니 군자의 기물이 아닌 것이다. <노자 31장 참조>

지금은 군자라는 말을 쓰지 않는 편이라 군자거라는 말은 더 더욱 멀어져버린 낱말이다. 낱말이 없어지면 그 낱말이 지닌 뜻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린다. 이제는 군자거는 없어졌다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군자거란 군자의 삶을 말한다. 군자의 삶이란 수기하고 입신하여 임사하고 치인하는 것이다. 자신을 닦음이 수기이고 세상에 나아가 일할 자리를 잡음이 입신이다. 수기하지 않고서는 입신할 수 없는 길을 군자의 도라고 한다. 군자의 길은 한가하여 노니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힘든 일을 다 해야 나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군자의 길을 임사의 길이라 한다. 군자가 맡아 하는 일이란 정성껏 스스로 맡은 바 일을 기꺼이 다함이다. 군자가 맡아 하는 일을 치인이라 한다. 남을 다스림을 일러 치인이라 하고 이는 곧 치세로 이어진다. 그러니 군자란 오늘날로 치면 백성으로부터 허락받은 삼권을 맡아 종사하는 자들이다. 정치인이든 관리이든 판검사이든 군자의 길을 걸어가야 진정한 치자가 되는 것이다.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여 백성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관존민비란 말은 군자의 길을 송두리째로 끊어버림이다. 말하자면 탐관오리란 군자를 잡아먹는 짐승일 뿐이다. 그래서 『맹자』에도 탐관오리를 내버려두는 폭군은 <솔수식인>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군자는 백성을 높이고 자신을 낮춘다. 이런 마음을 늘 지니면서 삶에 임함을 일러 구좌라고 한다. 부드러움을 뿌리로 삼고 어울림을 등걸로 삼아 백성이 마음 편히 가지를 뻗고 꽃을 피워 삶의 열매를 맺게 정성을 다하는 군자가 걷는 길을 풀이하여 구좌라 하는 것이다. 구좌는 상좌와 같다. 왼쪽을 받든다고 함은 삶을 받듦이다. 왼쪽은 양이요 동이며 생을 뜻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생을 소중히 하고 받들어 피어나게 함을 일러 구좌라 한다. 봄이 와서 온갖 초목이 싹을 틔우는 모습이 곧 구좌의 모습이다. 그러나 가을 와 서리가 내려 초목의 잎사귀들이 시들어지는 모습을 일러 귀우라 한다. 오른쪽은 음이요 서요 사이다. 귀우란 죽음을 소중히 받듦이다. 생이 사로 이어짐을 귀우라 하는 것이다. 귀우란 죽음을 받들라 함이다. 이는 살생을 일삼지 말고 두려워하라 함이다. 그래서 군자의 용병은 귀우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군자의 용병은 귀좌로 돌아온다.  군자는 백성의 삶을 위협하는 경우에만 마지못해 용병할 뿐이지 군왕의 야욕을 따라 결코 용병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군자의 용병을 두고 <군상좌>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군자의 병이라 한들 병이란 백성한테는 이롭지 않은 기물일 뿐이다. 따라서 군자가 용병한들 그 병사나 무기란 군자가 쓸 것이 아니다. 군자의 길에는 어떠한 전쟁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군자는 아무리 역경에 부딪쳐도 귀좌의 수기를 저버리지 않기에 군자는 결코 백성을 배반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군자의 삶은 존도하고 귀덕하면서 백성의 밑에서 심신을 다하는 현자가 되는 것이다. 현자는 지혜로써 사물을 부려 재물을 풍성하게 하여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치자를 말한다. 이런 연유로 현을 백성에게 재물을 나누어줌이라 하고 성을 백성에게 덕을 나누어줌이라고 한다. 군자는 이러한 성을 본받아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심신을 다하므로 귀좌의 현자라고 칭송받게 된다.

-등짝의 가시만 믿는 고슴도치 면하려면
挫其銳(좌기예라)

挫其銳 解其紛(좌기예 해기분)
和其光 同其廛(화기광 동기전)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다툼을 없애며, 그 빛냄을 누그려 없애고, 그 속세와 같이한다. <노자 4장 참조>

모난 돌은 망치질 당하니 매사에 모나지 마라. 모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루뭉수리로 구렁이 담 넘듯 사라는 것은 아니다. 일마다 그에 따른 사리가 있게 마련인지라 근본과 말단을 살펴 조심조심 삶을 삼가라는 뜻을 담고 있을 뿐이다. 살아가면서 사리의 사에 기울어져도 모나게 되고 이에 치우쳐도 모나고 만다. 사리의 사란 서로 달라 분별되고 차별됨이고 이란 서로 같아 하나가 됨이다. 인간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같아 인간의 삶도 따라서 그러하다. 모난 사람은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기 쉽고 심하면 제가 만든 대롱을 통해서 세상을 들여다보려 해 다른 점만 바라본다. 그러자니 한 쪽만 보이지 두루 보일 리 없어 외나무다리에 서 있는 줄 모르고 허공에 발 디딜 자리가 없음을 모른다. 예리한 칼날 같고 송곳 끝 같아서 이런저런 것들을 잘 분석하여 판단 할 수 있다면서 남보다 더 예리하고자 쉬지 않고 숫돌에다 칼 가는 짓을 마다하지 않음이 오늘 날 세태의 천태만상이다. 콕콕 꼬집어 끄집어내 샅샅이 쪼개고 갈라 분석한 다음 다시 원상대로 복합해 보면 사태가 어떠한 지 정확한 진단을 내려 최선의 처방을 내릴 수 있다고 지금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고 산다.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마치 기계덩어리쯤으로 여기는 셈이다. 이는 마치 등짝의 가시만 믿고 오소리를 우습게 보려는 고슴도치와 같은 꼴이다. 오소리는 고슴도치의 배바닥은 가시밭이 아니라 부드러운 살갗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고슴도치 등짝의 가시밭도 뒤집히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니 현명한 고슴도치라면 제 아래쪽은 가시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야 한 터이다. 이처럼 가시처럼 뾰족하게 굴수록 끝이 문질러져버리기 쉽다. 칼날이 날카로울수록 나뭇가지 얼마 못 쳐내고 무너지고 말듯이 날카로움을 무디게 할 줄 모르면 모난 돌처럼 망치질 당하여 깨지고 만다. 한때는 지성을 앞세워라 하더니 이제는 감성을 앞세워라 한다. 저때는 사물을 알아보라고 재촉하더니 이제는 사물을 느껴보라고 몰아붙인다. 안다는 것은 말로써 공통분모를 나누어 갖기 쉽지만 느낀다는 것은 말로 하기 어려우니 공통분모를 찾아내 나누기가 어렵다. 감성이라는 것을 앞세우면 세상을 제 안경 쓰고 제 뜻대로 보고 거기 따라 색칠하기 쉽다. 남과 달라야 살아남는다고 저마다 속셈을 드러내지 않고 감성의 송곳이 남보다 더 날카롭기를 바란다. 요새는 마음속에 날카롭게 제 송곳을 갈아줄 숫돌 하나씩을 마련해두고 세상과 사물을 마주하려고 한다. 이런 탓으로 이른바 ‘스트레스’를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바깥을 닫고 침묵하면서 자기를 만나보는 순간을 갖고자 하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잠자리 들기 전 얼마 동안만은 세상사 다 접어두고 자기를 만나 자신을 쓰다듬어주어야 하는 순간을 마련할수록 세파에 시달리는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잠들 수가 있는 법이다. ‘스트레스’란 강박함이다. 바깥 것들이 나를 사정없이 윽박질러 숨 막히게 하는 강박에 시달림보다 자기를 자기가 윽박지르는 경우가 더 사납고 비참하게 몰아간다. 이런 가위눌림을 벗어나자면 사람을 떠나 자연을 만나야 한다.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면 곧장 마음이 자연을 닮게 된다. 마음을 조이게 하는 것들을 털어내고 나면 지글거리던 마음이 잔잔한 물처럼 출렁임을 멈추고 마음속의 날카로운 송곳 끝이 서서히 무뎌지기 시작하면 드디어 마음은 자연을 닮는다. 도시를 떠나 산천으로 간다고 자연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온갖 욕망의 밧줄을 놓아버리는 순간 마음은 어느 난장판인들 곧장 홀가분해져 고요 즉 정을 누리 수 있다. 그 고요를 즐기면 한 순간만이라도 걸림 없이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마음속의 날카롭기 짝이 없는 송곳 끝부터 꺾어 무디게 할 일이 급하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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