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 하동뉴스
  • 승인 2021.08.2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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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제1장: 낳아주되 갖지 않는다
제2장: 성인께는 정해 둔 마음이 없다
제3장: 경솔함은 곧장 뿌리를 잃는다
제4장: 제 태어난 바를 싫어하지 말라
제5장: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이 없다

행복은 깃털보다 가볍고 모래알보다 싸다
無欲以靜(무욕이정이라)

無名之樸(무명지박)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
天下將自正(천하장자정)

무명의 본디 그대로는 또한 욕심내지 않음을 실행한다 하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고요하면 세상은 장차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 <노자 37장 참조>

자연은 무명이다. 이것은 돌멩이고 저것은 소나무이고 또 저것은 참새이고 등등 만물에다 이름을 붙여두고 호명하는 것은 사람의 짓이지 자연의 짓은 아니다. 물론 태양이니 달이니 은하수니 ‘블랙홀’이니 ‘빅뱅’이니 ‘H2O', '중력파’니 등등 온갖 이름들은 오로지 사람이 만들어 부르는 짓일 뿐이다. 자연은 본래부터 이름이 있고 없고 말도 없다. 그래서 불언지교 즉 말없는 가르침이란 자연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 자연에 이름이나 말만 없을 뿐이겠는가! 욕심이라는 것이 없으니 자연을 일러 한 글자로 박이라 하는 것이다. 박이란 나뭇등걸을 말하지만 그냥 그대로라는 뜻이다. 다듬거나 깎아 꾸밈이 하나도 없음이 그냥 그대로이다. 마음속에 아무런 낌새가 없다면 그런 마음이 곧 그냥 그대로의 마음이다. 그냥 그대로의 마음을 무욕이라 하고 그냥 한 글자로 정이라 한다. 마음이 욕에 휘말리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그냥 고요할 뿐이다. 욕심에 꼬이고 마는 마음이 있고 욕심에 꼬여들지 않는 마음이 있다. 욕심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아라야 무욕하고 마음이 고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즐거운 행복이란 욕심이 없어서 누리는 마음의 고요 바로 그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정말로 즐거운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고 권력으로 차지할 수 없으며 명성으로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은 깃털보다 더 가볍고 황금이 아니라 모래알보다 더 싸다는 게다. 그런데 사람들은 깃털보다 가벼운 행복을 지고 갈 생각을 버리고 태산보다 무거운 돈이니 명성이니 권세를 칭칭 감아서 짊어지고자 끙끙거리며 굶은 개처럼 끙끙거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돈 명성 권세 등등이 행복 그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을 돈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에 편안한 마음의 행복 즉 마음의 고요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부자들이 모조리 사들일 터이니 말이다. 돈 명성 권세 등등을 넘치게 거머쥐고 나면 행복은 그만 떠나고 만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마나 잡은 행복을 뺏길세라 자나 깨나 심란해 바람 부는 억새밭같이 살아간다. 심란함이 곧 불행함이고 불행이란 마음속에 온갖 잡생각이 얽히고 뭉쳐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심화이다. 마음을 태워 졸이는 것보다 더한 불행은 없다. 불행은 이 욕심 저 욕심을 꼬드기다 불쏘시개에 튄 불똥 같다. 불쏘시개는 산천을 태워버리는 불길을 지펴내는 데 불똥 하나면 충분하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고 꿀맛 본 생쥐는 꿀단지가 목숨 앗아가는 허방인 줄 모른다. 이렇듯 무욕과 유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모두 욕심 없이 태어난다. 살수록 성욕이 생겨난다. 이 성욕은 ‘sex'만 떠올리게 한다면 성정이라는 말로 바꿔도 된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 성정이라는 성욕을 누림이다. 성정이 그치면 그것이 곧 죽음이다. 정이란 마음 밖의 것들을 목숨이 만나서 일어난다. 그 정이 마음 밖의 것들을 차지하고자 하면 욕이 된다. 돈 명성 권력 등등 이런 것들은 정욕이지 본래 타고난 마음의 것은 아니다. 갓난애의 마음을 생각하면 금세 알 일이다. 젖 달라고 응애응애 보채다가 젖 물리면 쪽쪽 빨고 배가 차면 딱 그치고 색색 잠자는 영아의 마음 그게 바로 무욕이라는 것이다. 본래 무욕은 무과욕의 줄임이다. 넘치는 욕심이 없다. 그러면 그 마음이 곧 무욕이다. 그래서 과욕하며 하면 곧 무욕이라는 게다, 넘쳐나는 욕심을 줄여라. 그러면 누구나 무욕해지고 마음을 태우던 욕의 불길이 꺼져 심화는 심회가 된다. 마음이 재처럼 돼 고요하니 그냥 그대로 행복하다.

호랑이는 푸성귀를 탐하지 않는다
不如守中(불여수중이라)

虛而不屈(허이불굴)
動而愈出(동이유출)
多言數窮(다언삭궁)
不如守中(불여수중)

비어서 굴하지 않고 움직이면 더욱더 나온다. 말이 많으면 빨리 막히니 상도를 따름을 지킴만 못하다. <노자 5장 참조>

수중하면 언제 어디서든 순풍에 돛단배처럼 세파를 헤치고 아무런 탈 없이 삶을 누린다고 한다. 수중은 중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수중의 중은 가운데라는 뜻은 아니니 중간을 지키라는 말은 아니다. 수중이 말씀은 수중도를 줄인 말씀이라고 여기면 된다. 그러니 중도를 지키라 함이 여기 수중이라는 말씀이다. 중도란 가운데 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도의 중은 따를 순과 같은지라 중도는 곧 순도와 같은 말씀이다. 도를 따라라 이 말씀이 곧 중도이다. 물론 여기서 중도의 도는 <도법자연>의 바로 그 도이다. 자연을 본받는 도를 일컬어 상도라 한다. 그러니 여기 중도의 도는 인도나 인도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도이다. 자여의 도를 일컬어 상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중이라는 말씀은 자연을 따르기를 지키라는 말씀이니 이는 곧 상도를 따르기를 저버리지 말고 꼭 지켜가라 함이다. 세상천지에서 사람만 빼고 나면 수중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하늘땅은 물론이고 온갖 새나 짐승이나 온갖 풀이나 나물들 치고 상도를 어기고 제멋대로 사는 것들은 하나도 없다. 수중은 천사로써 알 수 있다고 한다.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를 천사라고 한다. <먹을 식- 먹을거리 사> 이처럼 <식>의 발음을 달리한다. 호랑이는 푸성귀를 탐하지 않아 천사하여 수중하고, 노루는 고기를 탐하지 않아 수중한다. 나아가 초목은 해와 땅이 주는 먹을거리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씨를 맺고 허락받은 자리를 만족하고 산다. 바닷물에 사는 물고기는 바다를 떠나지 않고 시냇물에 사는 물고기는 시냇물을 떠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만 제하면 어느 목숨이든 오로지 수중하면서 삶을 누린다. 다른 여러 목숨들과 견주어보면 사람은 끝이 없는 욕심꾸러기의 목숨인 셈이다. 사람의 욕심보다 삼라만상을 모조리 싸고도 남을 만큼 한이 없다. 사람의 욕심은 한강물을 다 들이켜도 목마름이 풀리지 않는다고 함은 인간의 탐욕을 말함이다. 인간은 바로 이 탐욕 탓으로 수중을 밥 먹듯이 어기면서 방자하게 산다. 하늘땅을 얕보고 업신여기는 겁 없는 짓을 오히려 인간이 찾고 누리는 멋이라며 떵떵거린다. 이런 탓으로 사람만 목숨이지 그 외 다른 것들은 인간을 위한 물건쯤으로 여기고 판을 친다. 담양에 있는 소쇄원과 요새 서양풍을 본뜬 정원들을 견주어 보면 수중하고 안 하고를 단박에 확인할 수가 있다. 소쇄원에 있는 나무들은 그냥 그대로 저마다 자리를 잡고 산천에 살듯이 살고 흐르는 물도 그냥 생긴 개울 따라 흘러가는 데 빈터를 잡아서 정자를 짓고 산천을 좀 빌렸을 뿐이지 사람의 손을 거의 미치지 않으려고 한 모습이 선연해 수중하고서도 정원을 마련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요새 정원이라면 모조리 서양풍을 본떠 나무가 가위질을 당한다든지 산천에 있는 바윗돌을 날라다가 눈요기로 박아둔다든지 물줄기를 인공으로 뿜어 올리는 분수라든지 등등 사람의 짓들로 꾸며져 인간이 범한 반수중이 넘쳐난다. 정원 따위로 수중을 어기는 짓은 별것 아닐 수 있다. 지금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중에서 천사 즉 자연이 마련해준 먹을거리라곤 거의 없어진 셈이다. 고사리 곰취 더덕 도라지 등등도 산천에서 그냥 그대로 자란 것이 아니라 밭이나 비닐하우스에서 살충제 농약으로 목욕하고 비료 주고 사람의 손으로 길러내 밥상에 얹히는 세상인지라 수중하지 하면 비웃고 마는 세상이다. 글/윤재근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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