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가을볕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가을볕
  • 하동뉴스
  • 승인 2021.10.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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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

                                박기섭


얘야, 사려거든 가을볕을 사려무나
웃돈을 얹어서라도 올볕을 사려무나
외상도 에누리도 말고 덤을 주면 덤을 받고

나절 볕을 달라거든 나절가웃 볕을 주고
이틀 볕을 달라거든 사흘 볕을 주려무나
가을볕 넉넉한 마당에 인심이 난다 하잖든?

-《서정과현실》(2021년 하반기)

【시인 소개】
박기섭 / 1954년 대구 달성 출생.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옴. 『키 작은 나귀 타고』, 『비단 헝겊』,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외 다수의 시집이 있음. 대구문학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대구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등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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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구자들은 ‘시(詩)란 곧 어조(語調)’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시에 대한 이론이 다양하지만, 시란 별 게 아니라는 거지요. 어조(語調), 즉 말투라는 겁니다. 어떤 식의 말투를 쓰느냐가 곧 어떤 시인가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이 시를 읽어보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을볕의 따뜻함이 “~려무나”로 끝나는 저 완곡한 말투에 실려서 더 곡진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요즘 말투로 고쳐서 읽어보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지요. “사려무나” “주려무나”는 “샀으면 좋겠구나” “주었으면 좋겠구나”와 의미가 비슷하지만 와닿는 느낌은 많이 다릅니다. 이게 바로 시조의 맛이고, 특히 우리의 고유한 정서가 녹아 있는 전통시조의 맛입니다. 
“한나절 볕을 달라고 하면 반나절 볕을 더 얹어서 주고/이틀 볕을 달라고 해도 사흘 볕을 주면 좋겠구나/가을볕이 넉넉한 집이 인심도 넉넉하다고 하지 않든?” 요즘 어투로 고쳐서 읽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가을볕이 좋아야 풍년이 될 테니, 가을볕의 넉넉함이 곧 농촌 인심의 넉넉함이 아닐는지요. 
예전에 할머니들께서는 초가을 햇볕이 아깝다고 하시며 다 마른 고추를 거푸 말리셨지요. 요즘도 가을볕 아래 환하게 널린 시골 마당의 붉은 고추를 보면 왠지 눈물이 핑 돕니다. 아마도 너무 투명하고 푸진 가을볕에 그냥 눈이 시려서 그렇겠지요?

(김남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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