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그래서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그래서
  • 하동뉴스
  • 승인 2020.03.1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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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중략…)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시집『수학자의 아침』(문학과지성사, 2013)

【시인 소개】
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가톨릭대 국문과 졸업.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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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때문에 세상이 적막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말의 길은 끊어지고, 내게서 건너가는 말도 내게로 건너오는 말도 모두 단절되었습니다. 저마다 섬이 되어 떠다니고 있습니다. 감염의 의심만으로도 가차 없이 격리됩니다. 저마다 자신의 세계에 감금됩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하는 말을/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도,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하나로마트 앞에는 마스크를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서로 위험한 존재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며 두려운 사람들끼리 앞뒤로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습니다. 안부가 불안을 깨울 테니까요.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겠지요. 아무리 무서운 역병일지라도 희망을 이기지는 못할 테지요.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얼굴을 가려도, 맞잡을 손을 가로막고 울타리를 쳐도, 사람만이 희망이고 사람만이 백신임을 알게 될 테지요. 그래서 질병은 인간의 오만함을 다스리기 위해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도 하나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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