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20그램의 무심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20그램의 무심
  • 하동뉴스
  • 승인 2021.06.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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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그램의 무심

                                         고진하

빈 둥지 아래 땅바닥엔
백금 같은 제비 똥만 수북했네
그렇게 애지중지한 녀석들인데
똥만 잔뜩 갈겨놓고
온다간다 말도 없이 떠나다니
넋 나간 사람처럼
쪽마루에 앉아 있다가
만남이나
이별에도 무심한
저 야생에 닿지 못한
속물근성을 부끄러워하다가
딱딱하게 말라붙은 이별
불투명한 사랑 긁어내지 않고
며칠 두고 보기로 했네
지금쯤 어느 먼 하늘을 날고 있을까
20그램의 무심(無心)은…

-계간 《시와 사람》(2021년 봄호)

【시인 소개】
고진하 / 시인이자 목사. 강원도 영월 출생. 감리교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나와 목회자 생활을 함.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강원문학상 등 수상. 현재 치악산 가까이에 살면서 명상과 저술에 전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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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시골에는 집집마다 처마 밑에 제비집이 있었지요. 제비는 초봄에 와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워 가을이 되면 떠났지요. 새끼들이 날갯짓을 배워 떠날 때가 다가오면 일가족이 빨랫줄에 나란히 앉아서 지저귀는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제비 똥만 수북한 채 제비는 떠나 버리고 온 집안은 텅 빈 듯이 적막했지요. 그때의 섭섭함과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철새가 인간과 가족으로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지금 애지중지했던 제비가 “똥만 잔뜩 갈겨놓고/온다간다 말도 없이 떠나”버린 무심함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하지만 곧 만남이나 이별에 연연하는 자신의 속물근성을 깨닫고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딱딱하게 말라붙은 이별/불투명한 사랑 긁어내지 않고/며칠 두고 보기로” 합니다.
사랑을 주었던 대상과의 이별은 고통스럽지요. 하여 이별은 상처를 수반합니다. 이런 탓에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어느 쪽도 상처받지 않는 이별이겠지요. 그렇다면 같이했던 시간에 어떤 의미부여도 허락하지 않는 ‘무심(無心)’이야말로 아름다운 이별의 한 경지가 아닐까요? 늘 그렇듯이 ‘야생으로서의 자연’은 위대합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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