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와불사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기와불사
  • 하동뉴스
  • 승인 2021.10.26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와불사

                                  함순례


나의 기도가 저 높은

지붕 위나 담장에 올려져

고요히 피어오를 줄 알았더니

산사 뒤란 샘가에서

물받이로 쓰이고 있네.

세상에나, 조랑조랑

맑은 물소리에 씻기며

계곡으로, 마을로 낮게

흘러가고 있네.

ㅡ작은詩앗 채송화 제21호 『맞는 말』(2019년, 고요아침)

【시인 소개】

함순례 / 1966년 충북 보은 출생. 1993년 ≪시와 사회≫로 등단. 시집 『뜨거운 발』 『혹시나』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등이 있음. 제9회 한남문인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회원,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으로 활동 중.

------------------------------------------------------------------------------------------------------------------------------------------------------------------------------------------------------------

‘기와불사’란 사찰에서 건물을 새로 짓거나 오래된 기와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도나 관람객에게 기와를 판매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 기와는 소원을 적어서 다시 돌려주지요. 결국 기와를 파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이루어주겠다는 부처님의 약속을 파는 셈이지요.
그러니 기와불사에 동참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기와가 부처님의 눈에 띄도록 법당의 지붕에 오르거나 담장 위에 얹혀 오래도록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싶겠지요. 그런데 그 기와가 지붕이 아니라 “산사의 뒤란 샘가에서/물받이로 쓰이고 있”는 걸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속았다는, 그래서 분한 생각이 들겠지요.
하지만 시인은 분노가 아니라 감탄을 합니다. 자신의 간절함이 외면당한 채 버려진 게 아니라 “조랑조랑/맑은 물소리에 씻기며/계곡으로, 마을로 낮게/흘러가고 있”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렇지요. 간절한 기도는 기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새기는 것일 테고, 그 마음은 지붕 위로 높이 올라갈 게 아니라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스며들겠지요. 부처님은 세상의 가장 낮고 맑은 곳에 계실 테니까요.

(김남호/문학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