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편지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편지
  • 하동뉴스
  • 승인 2022.01.2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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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오인태

원로시인 한 분이
봉투까지 붓으로 또박또박 써
보내신 편지를 두 번이나 받고도
답신을 못해드렸다
일백여 자에 이르는 글자가
하나같이 정연하다
붓을 들 순 있지만
흐트러진 마음을 들킬까 두렵고
컴퓨터로 쓰자니
결례가 될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끓이다가
잘 표구해서
책상 앞에 걸어두었다
오래 고아로 사는 방
어른 한 분 들어앉으신 듯
조심스럽고도
참 편안하다

-시집 『별을 의심하다』(애지, 2011)

【시인 소개】
오인태 / 1962년 경남 함양 출생. 1991년 『녹두꽃』으로 등단. 시집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 『혼자 먹는 밥』, 『등 뒤의 사랑』, 『아버지의 집』, 『별을 의심하다』, 『슬쩍』 등이 있음.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으로 활동. 현재 하동 묵계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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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던 수단이었고, 감동적이고 절박했던 ‘2인칭 문학’이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얼굴도 모르는 국군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를 썼고, 이웃집 소녀에게 연애편지를 썼고, 어버이날마다 손이 오그라드는 효도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다 지난 이야기입니다. 손으로 쓰던 그 정감어린 편지는 전자우편에게 자리를 내어주더니 그마저도 문자나 카톡으로 대체된 지 오래입니다.
시인은 평소 존경하던 원로시인한테서 두 번이나 편지를 받습니다. 그 편지들은 아마도 아끼는 후배시인을 격려하는 정도의 범상한 내용이었겠지만 문제는 형식입니다. 겉봉투까지 붓으로 정연하게 쓴 어른의 손글씨 때문에 시인은 감동과 부담을 동시에 느낍니다. 같이 붓으로 답신을 쓰자니 그 정갈함을 따를 수가 없고, 컴퓨터로 출력하지나 결례가 될 것 같습니다. 고민 끝에 그 편지를 표구해서 책상 앞에 모셔둡니다. 그랬더니 ‘고아’처럼 텅 비었던 방이 어른 한 분 모신 듯이 꽉 찹니다. 손편지의 위력입니다.
저도 가끔 아는 시인들이 시집을 보내오면 그 시집에서 가슴에 와 닿는 시 한편을 골라 우편엽서에다 공들여 베껴 써서 보내줍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낭만마저도 누리기가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지난해 9월 1일부터 우표값과 엽서값이 350원에서 400원으로 오른 걸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우편엽서를 찾는 사람이 없어서 우체국에 가도 엽서를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김남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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