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연재] 피는 꽃은 이쁘고 지는 꽃은 미운가
  • 하동뉴스
  • 승인 2022.03.0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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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제1장 낳아주되 갖지 않는다
제2장 성인께는 정해 둔 마음이 없다.
제3장 경솔함은 곧장 뿌리를 잃는다
제4장 제 태어난 바를 싫어하지 말라
제5장 배우기를 끊으면 걱정이 없다 

-하늘땅 사이에서 암·수컷이 조화하는 기운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라) 

道生一 一生二(도생일 일생이)
二生三 三生萬物(이생삼 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셋을 낳고 셋은 온갖 것을 낳는다. 온갖 것은 음기를 지니면서 양기를 간직하고 음양은 충기로써 화기가 된다. <노자 42장 참조>


나를 부모가 낳았다. 이 말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누가 낳았나? 조부모가 낳았다. 그렇다면 조부모는 누가 낳았나?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도 끝이 없으니 그냥 조상이라 하고 만다. 그래도 조상은 어찌 낳게 되었을까? 그런 물음은 그치지 않고 이어져 산마루에 올라갔다고 치자, 산 밑에서 마루까지 올라가고 나면 더는 올라갈 데가 없다. 발밑에는 땅이고 머리 위에는 하늘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천지사이에 서 있는 자신을 누구나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천지가 만물의 부모라는 말씀이 떠오르게 되면 ‘야호’라고 소리치며 기고만장하지 못하고 엄숙해지게 된다. 뒤따라서 천지란 자웅이라는 말인가? 산마루에 서거나 앉아서 저 하늘이 수컷이고 이 땅이 암컷이라는 말인가? 다시 그렇다면 천지라는 수컷과 암컷은 그 무엇이 낳았단 말인가? 아마도 태고의 성인께서 천지를 낳아준 어미를 도라고 불러놓은 셈이다. 도를 암컷으로 여기고 현빈이라 부른 이가 바로 노자이다. 그리고 노자는 또 알려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암컷의 생식기를 일러 중묘의 문이라 했다. 천지와 온갖 것들은 그 문으로 나오고 다시 그 문으로 되돌아 들어간다니 중묘의 문이라고 불러둔 셈이다. 생각해보면 목숨의 생사보다 더 묘한 것이란 없다. 묘나 현이란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만지려 해도 만질 수 없음이라 아무리 알려고 해본들 알 수 없음을 일컬음이다. 그래서 현묘하면 있는 듯한데 없으니 황하고 없는 듯한데 있으니 홀하다는 게다. 목숨을 낳는 힘을 생기라 한다. 그 기운보다 더 현묘하고 황홀한 기운은 없다. 생기는 암컷과 수컷이 하나가 되어야 이뤄진다. 그런 생기를 충기라고 한다. 충기의 충은 <빈 허>이고 <따를 중>이고 <어울릴 화>를 하나로 묶음이다. 이러한 충은 『주역』 이 말하는 <일음일양>인 셈이다. 음은 양이 되어주고 양은 음이 되어줘 음양이 하나로 어울림은 남녀의 성교를 떠올리면 살펴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성교란 성공이다. 암수가 함께해야 새끼를 낳는 것이다. 새끼를 낳고자 암수가 성교함은 현묘하고 황홀하다. 그러나 새끼를 낳기 위한 성교의 현묘하고 황홀함을 탐하여 가볍게 여기는 동물이 인간이다. 인간은 새끼를 낳기 위해서만 성교하지 않아 천하게 하지만 짐승들은 성교를 성스럽게 한다. 짐승들은 오로지 새끼를 얻기 위해서 성교하지 인간들처럼 성교를 탐닉하지 않는다. 냇가에 사는 물총새의 암수를 보면 참으로 성스럽다. 알 낳는 철이 돌아오면 암컷은 나뭇가지 위에 동그마니 앉아 있고 수컷이 열심히 물속을 들락거려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그 물고기기를 암컷에게 먹여주면 암컷이 교미를 허락해준다. 물총새의 교미를 보면 새 생명을 낳는 자연의 이치가 바로 충기로써 됨을 눈으로 볼 수도 있다. 알을 낳아 품어 알 속에 든 새끼가 나오게 하자면 암컷은 먹이사냥을 할 수 없을 터이니 수컷이 교미하기 전에 암컷에게 영양보충을 시켜주어야 함을 물총새는 학교 같은 데 가서 배운 것이 아니다. 이런 절묘함을 일컬어 하늘땅 사이에서 암컷 수컷이 조화하는 기운이라 하고 그 기운을 일러 충기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새끼를 낳기 위한 성교야말로 현묘하고 충기를 누림이다. 천지에서 온갖 암수들이 끼리끼리 짝을 맺어 새끼를 낳음이야말로 현묘하고 황홀한 어울림이다. 암수가 성교를 해서 낳은 새끼야말로 암수라는 둘이 하나로서 조화한 새 목숨이 아닌가! 요새는 정자와 난자가 합쳐 새끼가 된다고 하는데 음기와 양기가 조화돼 새끼가 태어나는 것이 천도 즉 자연의 이치이다.

 

-탐욕이라는 적을 얕보면 반드시 패한다.
禍莫大於輕敵(화막대어경적이라)

禍莫大於輕敵(화막대어경적)
輕敵幾喪悟寶(경적기상오보)

재화에서 적을 가볍게 여김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적을 가볍게 여기면 나의 보배를 거의 잃어버린다. <노자 69장 참조>


적이란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욕망의 덩어리인지라 마치 그 욕망이 짓누르는 바윗덩이 같다는 가위눌림에 소스라칠 때가 빈번할수록 그 삶은 짓밟히기 쉽다. 물론 산다는 일이 이런저런 온갖 욕망과 마주치고 시달리며 헤쳐 가느라 인생고해라 탄식하기도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들이 마치 풍랑이 험한 바다 같은 날이 허다하다. 왜 이렇게 삶이 풍랑이 거친 바다 같을까?
이렇게 자문해보는 사람일수록 어느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자신 탓으로 인생의 바다가 거칠어진다는 사실 앞에 마주 설 수 있다. 그리고 인생 자체가 고해가 아니라 내 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욕망 탓으로 인생이 거친 바다와 같음을 깨우칠 수도 있다. 그렇게 깨우치는 순간부터 풍랑으로 거칠던 바다가 서서히 잠잠해져 인생의 돛을 달고 순항의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니 인생을 험하게 출렁거리는 바다로 돌변시키는 탐욕 보다 더 무서운 적이란 없다. 자기를 패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적이 자기 밖에 있기보다는 바로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편이다.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적이 바로 자기가 부리는 탐욕임을 깨우친 사람은 자신 속에 도사린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병법을 안다. 전쟁터에서만 병법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병법들 중에서 싸우지 않고 적을 물리쳐 이기는 것이 최상의 병법이라 한다. 그러자면 자기한테 싸움을 걸어올 적을 만들기 않음이 최선의 병법이 된다. 탐욕을 부리면 바깥의 적을 불러와 그 적한테 패하기 쉽지만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그 적한테 질 리가 없다. 탐욕을 겁 없이 부리는 사람은 탐욕이라는 적을 얕보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온갖 적을 불러와 겨루고 다투다가 필패 당하고 마는 것이다. 예전에 감나무가 많은 고을에는 까치밥 병신이라고 평생 손가락질 당하는 자가 한둘씩은 있었다. 산천엣 밥 먹을 때 벌레들과 나눠먹자고 고수레하고, 유실수에서 열매를 수확할 때 모조리 따지 않고 약간씩 다람쥐 몫으로 남겨두듯이 가을에 감을 딸 때 맨 꼭대기에 달린 감 네댓 개를 까치 몫으로 남겨두는 풍습이 있었다. 상달이 지나 된서리가 내리면 감나무 꼭대기에서 유난히 발갛게 빛나는 홍시가 군침을 당기게 마련이다. 그 홍시를 탐내고 감나무 꼭지 근처까지 아슬아슬 올라가다 그만 감나무 가지가 부러져 훌렁 떨어져 허리를 부러뜨려 곱사등이가 되거나 다리가 부러져 절뚝발이가 되거나 아니면 머리통이 깨져 그 자리서 죽고 마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까치밥 탐내면 병신 된다고 아이들한테 어른들이 겁주곤 했다. 홍시 하나 탐내다가 평생 병신 소리 들어가면서 사는 일보다 더한 불행은 없을 터이다. 이런 불행은 홍시를 얕보아서가 아니라 홍시를 탐한 욕심을 얕본 까닭에 당하는 것이다.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을 가볍게 여긴 탈이다. 탐욕이라는 적을 가볍게 여기고 얕보면 그 누구든 간직한 보물을 잃어버리고 만다. 누구나 탐욕을 버리기만 하면 그 보물로써 삶을 편안하고 즐겁게 누릴 수 있다. 그 보물을 노자께서 삼보라 밝혔고 그 삼보가 간직된 마음을 일러 <소사과욕>이라 알려주었다. 소사하여 과욕함이야말로 탐욕의 적을 물리치는 최상의 병법이다. 소사란 내 몫을 적게 함이다. 그러면 과욕이 저절로 뒤따라온다. 과욕이란 욕심을 줄여 적게 함이다. 탐욕이라는 무서운 적은 다사로 말미암아 과욕을 부추긴다. 제 몫을 많게 하면 저절로 욕심이 넘쳐난다. 욕심이 넘쳐 제 몫을 많게 하면 남의 몫이 줄어들어 겨루고 다툼이 빚어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탐욕이라는 적은 바깥의 적을 불러들여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삼보를 잃게 한다. 그 세 가지 보물이란 사랑함이고 검소함이며 나서지 않음이다. 탐욕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자-검-불감위선을 잃어 인생의 패자로서 늘 흉하게 허덕인다.  글/윤재근·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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