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에 스며들다-아무 연고 없는 하동에서 시작된 나의 이야기
[연재] 하동에 스며들다-아무 연고 없는 하동에서 시작된 나의 이야기
  • 하동뉴스
  • 승인 2023.10.13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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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면 박나리

 연고도 없는 하동에 들어와 어느덧 귀촌 8년째를 맞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북천면 금촌 마을 이장부터 북천초등학교 학부모운영위원장까지 역임하게 되었으니, 이제 여기가 또 다른 고향이다. 처음 하동에 온 계기는 이랬다. 창원에서 오래 다니던 직장이 광양에 2공장을 신설하게 되면서 회사에서 같이 가서 일해보자는 제안을 해왔고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고 그만뒀으나 고민 끝에 신랑과 함께 옮기게 되었다. 광양에서 전셋집을 구해 2년 동안 직장에 다니며 살다 전세 만기로 집을 알아보게 됐다. 마침 친정아버지께서 노후에 귀촌을 생각하셔서 매일 촌집들을 보고 계셨는데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하동 북천면 금촌 마을에 촌집이 하나 났다고 하셨고 그곳에서는 회사 출퇴근이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신랑과 함께 와 봤더니 광양에서 출퇴근하나 하동에서 출퇴근하나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고 아버지가 노후에 오시기 전까지 집을 비워두기 그러니 저희가 들어와 살겠다고 말씀드렸다. 둘이서 두 달을 셀프 리모델링을 하며 집을 완성한 뒤 이사를 했다. 나는 그때 당시 결혼 3년 차인데 아이가 생기지 않아 인공수정을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임신 준비를 해보자고 생각하여 신랑은 계속 하동에서 광양으로 출퇴근을 하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임신 준비에 들어갔다.

 하동에 이사 온 지 1년 만에 첫째가 생겼고 출산까지 하게 되었다. 가족이 생긴다는 건 축복과 같았다. 그리고 1년 뒤 둘째까지 가졌다. 그렇게 아이가 안 생기더니 하동에 오고 나서부터는 어떻게 그렇게 금세 두 아이가 생겼는지 우리 가족들은 신기하기만 했다.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이 제일 잘된 일 중 하나라고 하신다. 하지만 부부 둘이서 아무도 연고 없는 곳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둘째 출산을 한 달 앞두고는 첫째를 도저히 데리고 있을 수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다 같이 친정에 가기도 그렇고 시댁에 도움을 받을 상황도 아니었기에 첫째를 이제는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르신들이 곤양에서 차가 오더라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제일 먼저 그곳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어린이집에서는 집 앞까지는 차가 오지 못한다며 북천초등학교 앞까지는 데리고 와 줘야 한다고 했다. 그 다음 후보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검색해서 가봤는데 그곳도 횡천까지 데려다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하실 수 있겠냐고 원장님께서 걱정을 하셨다. 어차피 데려다 줘야 하는 거 이곳으로 보내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있었는데 만삭의 몸으로 첫째의 어린이집 등·하원을 시켰고 다행히 첫째 아이도 어린이집에 적응을 잘해 나갔다. 그렇게 첫째는 어린이집에 보내고 하동군민여성의원에서 첫째와 두 살 터울로 둘째를 12월에 출산을 했다. 신랑이 둘째가 태어날 쯤부터 일이 너무 바빠 우리를 보살펴 줄 수가 없었고(산후조리가 뭔가요…) 둘째를 낳은 그날도 병원에서 혼자 첫째를 보고 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도 참 대견했다 싶다. 아이 낳은 그 날에 첫째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병원에서 퇴원 후 갓난쟁이를 데리고 매일 오전 오후 차에 태우고 내리고 하며,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때는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횡천으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아들은 겨울에 태어나서 누나 따라 다닌다고 생후 20일 만에 폐렴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한 번에 둘 다 돌보기가 어려워 친정이 있는 부산에 가서 입원을 하였고 처음으로 가족이 생이별을 하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첫째는 태어나 입원 한번 안 했는데 지금도 감기에 잘 걸리는 둘째를 보면 신생아 때 폐렴으로 입원을 하게 돼서 그런 건 아닌 가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쳤다. 둘째인 아들의 어린이집 입소 신청을 해 놓았는데 기약 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코로나로 인한 어린이집 휴원은 끝나지가 않았다. 아이들과 집에서 갇혀 지내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다행이었던 건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 살았기에 집 앞 마당까지는 나갈 수 있어서 그나마 나았다.  도시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그때만큼은 우리를 제일 부러워했다. 그 후 코로나가 잠잠해 지면서 아이들의 등원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천에서 횡천까지 차량을 놓친 날은 어린이집이 있는 적량까지 등원과 하원을 시켰다. 딸은 7살에 북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으로 옮겼는데 그때 아들을 같이 옮길 계획이었다. 유치원은 5세~7세 통합반이다 보니 유치원에서도 늘 같이 있고 집에서도 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 첫째에게 스트레스가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아들이 5살에 12월생이라 유치원에 같이 보내는 것은 좀 무리다 싶어 1년을 더 어린이집에 다닌 후 유치원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올해 2월 드디어 어린이집 마지막 등원 길, 이 길을 이 시간에 지나가는 것도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이 길도 4년을 다녔구나 생각하니 뭉클하여 코끝이 찡했다. 첫째 때부터 참 아이들을 예뻐해 주신 안전 담당 선생님께 오늘이 마지막 등원 길이라고 이야기를 하니 “그동안 참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하시는데, 아이 보내고 오는 길에 그 말씀이 북받쳐 와 펑펑 울면서 왔다. 우리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이고 어쩔 수 없었기에 묵묵히 해왔던 일이었는데 남이 봤을 땐 고생했던 일이었구나, 아 내가 참 고생이 많았구나, 생각하며 울컥했다. 그렇게 시골에서의 우여곡절 어린이집 생활을 마치고 큰애는 어느덧 초등학교에 둘째는 병설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이 7살, 5살이 되었고 이제 아이들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시골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기에 맞벌이를 시작해 보려고 했다. 나는 기계 설계직에 종사했는데 아이들을 키우며 경력을 살려 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경력 단절녀가 되었다. 다시 시작하려 해도 기계를 설계하는 일은 재택근무가 어려워 새로운 일을 찾게 된 것이다. 우선 아무래도 시골에 살다 보니 ‘어르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어르신들이 많은 시골이다 보니 사회복지사를 찾는 일자리가 많아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사회복지사나 마을이장이나 어쨌든 어르신들을 돕기로 마음먹은 거 이장자리를 승낙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하동 최연소 이장이 되었고 신랑 또한 옆에서 마을 일을 같이 도와주다 보니 새마을지도자도 맡게 되었다.”

 자격증을 취득해놓고 이제 맞벌이를 시작해 보려고 하는 찰라, 마을 이장직을 맡게 되었다. 3~4년 전부터 주위 어르신들이 마을 이장하면 참 좋겠다고 하셨는데 아이들이 어렸기에 못한다고 저는 이장 일에 자신도 없다고 말씀드리며 계속 미뤄왔다. 그런데 어르신들은 마을에 이장할 사람이 없다고 젊은 사람들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계속 하셔서 주위 친한 어르신들께 제가 아이들도 어리고 마을에 그리 오래 산 사람도 아니기에 이장을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잘할 거라며 추천을 해주셨다. 신랑과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신랑도 처음에 엄청 반대를 했다. 그 자리는 잘해도 욕먹는 자리라며 애들 키우면서 어떻게 하려고 하겠느냐고 했다. 내가 어르신들이 좀 도와달라는 말씀을 하신다고 하며 모른 척 하기가 쉽지 않다고 신랑에게 털어놓았다. 이장 자리는 봉사하는 자리라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사회복지사나 마을이장이나 어쨌든 어르신들을 돕기로 마음먹은 거 이장 자리를 승낙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하동 최연소 이장이 되었고 신랑 또한 옆에서 마을 일을 같이 돕다가 새마을지도자까지 맡았다. 신랑은 늘 듬직하게 마을 일에 솔선수범하며 내 이장 일부터 마을 시설 수리까지 나서서 도와줘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어느덧 이장 맡은 지 2년 차에 접어들었다.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시골에 오래 산 것이 아니기에 모르는 것 투성이라 이곳저곳 몇 번씩 전화해서 물어봐야 하고 발품 팔아 바쁘게 뛰어다녀야 한다. 그래도 어르신들께서 ‘젊은 사람 이장하니 좋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  

 올해 첫째가 북천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북천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5명, 유치원생이 8명인 말 그대로 작은 학교이다. 그곳은 또 적은 인원의 아이들이 모여 있다 보니 운영위원회며 학부모회 임원들을 선출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어쩌다 보니 학부모운영위원장까지 하게 되었다. 위원장에 취임한 며칠 뒤 아무 아는 것 없이 하동 교육지원청에서 개최한 ‘자립과 공존으로 빛나는 작은 학교 회의’에 참석하고 왔는데 학교가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교장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모로 학교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는 과정에 있으며 위원장의 위치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지 세세하게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귀촌하여 겪었던 일들을 글로 쓰다 보니 아무 연고 없는 이곳에 와서 생각지도 못하게 마을 이장을 하고 있고, 학부모 운영위원장까지 맡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시에 살았으면 못했을 경험을 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위 지인들은 내가 시골에서 사는 것이 궁금해 와보기도 했고 와본 지인들은 근처 슈퍼도 하나 없고 배달음식도 안 되는 곳에서 어떻게 지내냐고 지금도 매번 도시로 나올 생각 없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이장을 맡았다고 할 때도 놀랬고 학교 운영위원장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더 놀라는 지인들을 볼 때마다 뿌듯해짐을 감출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골에 살면서 좋았던 건 아이들에게 “뛰어 다니지 마라”고 잔소리를 안 해도 되고 아이들도 자연과 함께하니 참 밝게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아프면 마을 전체 어르신들이 걱정을 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클 수 있다는 것에 매일 감사하면서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집순이였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움직이게 됐는지 지금도 아이러니하지만 내 좌우명이 ‘후회하지 말자’인 만큼 맡은 자리에서 뒤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알아보고 뛰어다녀 보려고 한다. 귀촌 8년 차, 아직도 새로이 적응해야 될 문제가 수두룩하다. 그것을 기꺼이 하나하나 헤쳐 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꿋꿋이 진행해 보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북천면 금촌마을 박나리 통신은 계속될 것이다. 글/하동군 제공 정리/하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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