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풀밭 법당 ―올망졸망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풀밭 법당 ―올망졸망
  • 하동뉴스
  • 승인 2023.10.1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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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법당 ―올망졸망

                                   
                                      최영욱

길고 요란스런 장마
비와 비 사이
그 사이를 틈타 밭의 풀을 뽑을 때
나는 악의 뿌리를 뽑듯
엄지손가락이 짓무르도록
풀을 베고 뽑았으나

풀밭 사이로 겅중거리는 어린 생명들
여치 메뚜기 청개구리며 우리 토종 산개구리까지
올망졸망 한세상을 열고 있었다

하여 저 어린 것들의 생명터를 들쑤시고
후벼파고 있는 것만 같아
낫도 호미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다 내려놓으니 풀밭 생명들의
살아 뛰는 소리가 경전처럼 들려오는 것이었다

  - 《계간문예》(2023년 가을호)
【시인 소개】
최영욱 / 경남 하동 출생. 정공채 시인의 추천으로 《제3의 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평사리 봄밤』 『다시, 평사리』, 산문집 『산이 토하면 강이 받고』 등이 있음. 제3의 문학상, 경남시학 작가상 등 수상. 박경리문학관장 및 이병주문학관장을 역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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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장마철에 밭을 장악하고 있는 잡초와 한판 전쟁을 벌인다. “악의 뿌리를 뽑듯/엄지손가락이 짓무르도록/풀을 베고 뽑”는다. 그런 전쟁의 와중에 시인은 발견한다. 마땅히 제거해야 할 악(惡)처럼 여겼던 잡초 밭에서, “여치 메뚜기 청개구리며 우리 토종 산개구리까지” “어린 생명들”이 모여서 “올망졸망 한세상을 열고 있”는 것을. 무심결에 “저 어린 것들의 생명터를 들쑤시고/후벼파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낫도 호미도 슬그머니/내려놓”으면서 시인은 비로소 듣는다. “풀밭 생명들의/살아 뛰는 소리가 경전처럼 들려오는 것“을.
법당(法堂)이란 흔히 불전(佛殿)이라고도 부르는 곳으로, 사찰에서 부처나 보살 등 신앙의 대상을 모시고 수행하는 공간이다. 신성하고 거룩한 법당과 온갖 잡초와 미물들로 북적대는 풀밭은 상반되는 장소이다. 하지만 시인의 사유는 상반되는 이 두 장소를 결합시켜서 ‘풀밭’이 ‘법당’이 되는 새로운 깨달음을 보여준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불성(佛性)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 두루 깃들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잡초를 뽑는 나에게도, 잡초 뒤에 숨은 여치에게도 부처는 있을 터. 하지만 서로 증오하며 싸우는 동안 자기 안의 불성을 잃고 만 것이다. 일찍이 「차밭 법당」을 통해 일상의 공간이 곧 수행의 공간임을 갈파한 시인은 「풀밭 법당」에서 또 다시 우리들의 잃어버린 불성을 깨우쳐주고 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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