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고라니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고라니
  • 하동뉴스
  • 승인 2023.10.3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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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진효정

적막한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라니가 묻는다
왜에ㅡ 왜에ㅡ
먼지같이 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핏대를 세워서 묻는다
가늘고 긴 다리를 짱짱하게 세우고 묻는다
나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라니가 떠밀려간다
왜에ㅡ 왜에ㅡ
물음이 울음으로 옮겨붙어 잡목 숲이 흔들린다
휘영 휘영 외진 밤길을 돌아서 
풀빵 같은 달을 따라 고라니 간다 
혀를 길게 빼서 달의 얼굴을 핥으며 간다

-시집 『지독한 설득』(애지, 2023)

【시인 소개】
진효정 / 경남 하동 출생. 2014년 『시와경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 『일곱 번째 꽃잎』 『지독한 설득』이 있음. 현재 이병주문학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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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울음소리는 처절해서 듣는 사람을 일순간 긴장시킵니다. “왜에ㅡ 왜에ㅡ”하며 절박하게 뭔가 묻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지요. 그것도 편하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먼지같이 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가늘고 긴 다리를 짱짱하게 세”운 채 “핏대를 세워서 묻는다”면 예사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처절하고 간절한 질문일수록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답이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이 삶의 진실이나 본질을 묻는 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시인은 즉문즉답하는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다그쳐서 질문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좋은 시인은 독자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지요. 
산길에서 맞닥뜨린 고라니는 시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휘영 휘영 외진 밤길을 돌아서”  “달의 얼굴을 핥으며” “물음이 울음으로 옮겨붙어” 흔들리는 잡목숲 속으로 사라집니다. 질문의 주체라는 점에서 고라니가 곧 시인인 셈이지요. 지금 시인은 고라니의 울음에 기대어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쩌자고 시인인가?”하고. 하여 감히 말하건대 나를 지금보다 더 나은 나로 만드는 일은, 정해진 모범해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처절하게 질문을 찾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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