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11월의 나무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11월의 나무
  • 하동뉴스
  • 승인 2023.11.1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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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

【시인 소개】
황지우 /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장.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 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음. 시집으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등 다수가 있음.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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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떨구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11월의 나무처럼 문득 맞닥뜨리게 되는 내 나이는 당황스럽습니다. 나이를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주민등록번호를 쓸 때면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되고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요. 오죽했으면 시인은 “나이를 생각하면/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했을까요?
내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인정하고 지금의 나를 이해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역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삶을 인정할 수 없고, 그 결과인 현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어떻게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단 말인가 스스로가 한심한 거지요.
어쩌면 나이는 우리가 살아온 날을 계량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남은 날을 계량하는 게 아닐까요? 이제부터는 남은 날들의 초라함과 비참함을 견디는 일밖에는 없다는 걸 나이가 매몰차게 깨우쳐주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우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11월의 나무도 미리 준비를 잘 하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12월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나이는 끔찍한 병명이 아니라 나태한 내 삶을 진단하고 처방해주는 의사이기도 하니까요. 병명을 아는 순간부터 치료는 시작되듯이 말이지요.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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