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서른 살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서른 살
  • 하동뉴스
  • 승인 2023.11.2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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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진은영

어두운 복도 끝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
1시와 2시 사이에도
11시와 12시 사이에도
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
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 없는 각성
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


【시인 소개】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형평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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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의 가정에 커대란 괘종시계가 걸려있었지요. 이 시계는 그 시각의 수만큼 종소리를 울려주어서 한밤중에도 때를 짐작하게 해주었지만, 묘한 것은 매 삼십분마다 한 번씩 울리는 타종소리였습니다.
밤중에 깨어나 뒤척일 때 한 번 울리는 이 타종소리는 듣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다는 것만 알려줄 뿐 한밤중인지 새벽이 다가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혼란은 가끔 유용합니다. 한번 울리는 이 종소리는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 없는 각성”으로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우리를 각성 시켜서 모종의 각오를 다지게 하지요. 절반에 왔음을 알리는 이 종소리에서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 ‘서른 살’이 어찌 절반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인생의 절반은 산술평균이 아닐 겁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그 지점이 바로 절반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매 시간 생의 절반을 지나고 있는 셈이지요.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 김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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