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중저가의 기쁨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중저가의 기쁨
  • 하동뉴스
  • 승인 2023.12.12 1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저가의 기쁨
                                        이화은

 

터미널 지하상가에서
민소매 원피스를 샀다 중저가의,
비밀연애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헌 옷 속에 숨겨두었다가
어느 마음 깜깜한 날 깜짝 나를 놀래켜 주리라
저 원피스와 나는 먼 내일을 약속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한 철 기쁘면 그만이다
느닷없는 소나기를 핑계 삼아
저급하게 슬쩍 옆구리에 달라붙어도 좋아
입 싼 여자처럼 펄럭펄럭
허벅지의 흰 살을 노출해도 봐줄 것 같은

남자가 나를 설레게 할 수 없는 저음의 계절에
미래는 짧을수록 좋다고
막다른 골목에 선 절박한 연인처럼
함부로 구기거나 얼룩을 만들어 탕진하고 싶은,
조금은 싼 티 나는


-시집 『절반의 입술』(파란, 2021)


【시인 소개】
이화은 / 경북 경산 출샌. 199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하다』 『미간』 『절반의 입술』이 있음. 시와시학상 수상.

-------------------------------------------------------------------------------------------------------------------------------------------------------------------------------------------------------------------------------------------

명품 매장에서 옷을 살 때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만 중저가 매장에서 옷을 살 때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지요. 혹시라도 내 삶이, 내 품격이, 내 가치가 이 옷의 가격으로 비쳐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겠지요. 지금 시인은 백화점 명품관은 엄두도 못 내고 “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중저가에 이끌려 옷을 삽니다. 그것도 “남자가 나를 설레게 할 수 없는” 저물어가는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는 “민소매 원피스를” 말이지요.
비싼 옷처럼 “먼 내일을 약속하지 않아도”되는 이 싸구려 옷은, “헌 옷 속에 숨겨두었다가/어느 마음 깜깜한 날 깜짝 나를 놀래켜 주”고 싶은 “비밀 연애”에 다름 아닙니다. 몹시 우울한 날에 이 민소매 원피스를 꺼내 입고 나를 잠시 놀래켜 주고는 버려도 되는, “다만 한 철 기쁘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옷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이 중저가 옷을 결코 한철만 입고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비싼 옷은 그 가격에 짓눌려 편하게 입을 수가 없지만. 싸구려 옷은 그 가격만큼 만만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요. “함부로 구기거나 얼룩을 만들어 탕진하고 싶은” 그런 만만함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맘껏 누릴 수 있게 하지요. 그래서 “조금은 싼 티 나는” 내 자신이 가끔은 사랑스러울 때가 있지 않던가요?

(김남호 /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