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동에 스며들다-8
[연재] 하동에 스며들다-8
  • 하동뉴스
  • 승인 2023.12.2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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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돌 마을의 꽃이 되다.
악양면 서경원 부부

하동의 4월은 그늘도 초록이다. 매화꽃망울이 톡톡 터지면서 봄이 시작되고, 섬진강변 따라 화개 쌍계사까지 벚꽃 터널이 만들어지면 하동은 봄의 절정에 이른다. 사시사철 하동은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지만 계절의 서곡을 알리는 봄이 되면, 곡우를 전후하여 악양, 화개를 중심으로 하동은 초록으로 물든다. 녹차 밭, 굽이굽이 그 초록 융단에 앉아 종일 찻잎 따는 여인들의 모습은 하동의 봄 문화 관광의 일부이며 이젠 나에게도 봄 일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늘도 난 차밭에 앉아 휘파람새의 노랫소리 들으며 새의 부리 마냥 뾰족이 내민 어린 찻잎을 따고 있다. 멀리서 찾아오는 벗들과 햇 차를 나눌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남편과 내가 부산을 떠나 지리산 자락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16년이 넘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부산에서 태어나 오십여 년을 그곳에서만 살아온 전형적인 도시인이다. 다른 지방에 가서 산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고, 더구나 시골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당시 정년도 한참 남아있는 데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종합병원 등 편의시설이 부족한 시골은 불편한(?) 곳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우리가 이렇게 16년이 넘도록 하동 살이를 하고 있다니 참 장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요즘은 부산에 나가더라도 서둘러 볼일을 마치고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 집이 있는 하동으로 돌아오곤 한다. 어느새 하동은 내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날 운동을 좋아하던 남편의 몸에 무리가 와서 남편은 하던 사업을 정리했다. 오래전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로 인하여 건강염려증을 앓고 있는 나를 염려해 남편은 황토 연구자를 찾아다니며 황토에 관한 책을 읽고 황토 집짓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2005년 가을, 하동에 귀촌한 지인 집을 방문하면서 문득 제 2의 삶을 산다면 나머지 인생은 하동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지리산 형제봉 아래 평사리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악양의 입석에, 정말 아무 연고도 없는 그곳에 토지부터 구매했다. 묵묵히 흘러가는 섬진강이 낯선 이방인인 우리의 손을 슬며시 잡아주었고, 뒤로는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 지리산 형제봉이 따스하게 품어주는 마을이었다. 오래전 논이었던 그곳은 다섯 단으로 되어있는 데다가 매실, 감, 녹차 등이 혼식 되어 있는 다랭이 식 밭 곳곳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버티고 있어, 집을 앉히려면 토목작업부터 여간 힘들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우리 이름의 땅을 가진 것이 기뻐서, 틈만 나면 부산에서 두세 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오곤 했다. 그 당시 남해고속도로는 주말 상습 정체로 돌아가는 길은 몇 배나 더 시간이 걸렸다. 마을을 지나 한참 산 쪽으로 올라가 주변에 인가도 없는 곳이지만, 봄이 되자 매화꽃이 만발하여 짙은 매화향이 사방에 흩뿌려지고 바닥엔 쑥부쟁이(그땐 그 초록 풀의 이름도, 그것이 나물이란 것도 몰랐다)가 양탄자처럼 깔려 있어 폭신폭신했다. 바람이 불어와 눈발처럼 하얗게 흩날리는 꽃잎들이 햇살에 눈이 부셨다. 벌들이 매화 향기를 좇아 잉잉거리고 이따금 산 꿩이 꿩꿩 적막을 깨는, 그때 그곳에서 느꼈던 천국의 평화와 평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리산을 좋아하는 남편은 2006년 가을, 전통 집짓기 교우들과 그 지리산 자락에 열 평 남짓 황토 오두막 한 채를 지었다. 본채는 내가 완전히 퇴직하면 짓기로 하고 터 작업만 해 두었다. 적막한 산골의 산방은 정말 앙증맞고 소담스러워 주말마다 달려오게 하는 우리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였다. 다녀올 때마다 우리 몸과 마음도 훨씬 건강해지는 것 같았다. 쑥과 국화도 구분하지 못하는 남편은 예초기와 전정기 부터 샀고, 미로 같은 나무들 사이의 수북한 풀들을 예초하고 감, 매실, 녹차 밭 전정도 했다. 농사일은 물론 농기구를 다뤄본 적이 없는 초보 농군은 전정기에 무릎을 다쳐 응급실에 실려 가는 호된 신고식도 치뤘다. 텃밭을 일구며 상추 깻잎 시금치 등 직접 키운 작물을 밥상에 올리는 기쁨으로 농촌 생활의 걸음마를 뗐다. 시골살이의 기본은 육체노동이라 하루해가 저물녘이면 온몸이 쑤시고 녹초가 되곤 했다. 그러나 군불을 때며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 불길을 보는 동안은 온갖 번뇌와 잡념이 사라지는 듯했고, 군불 땐 뜨끈한 아랫목에 등을 대고 누우면 세상의 모든 평온함은 다 우리 것인 것 같았다. 그렇게 주말이면 부산과 하동을 오가던 나는 2008년 마침내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평사리 들판의 유혹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정년을 10여 년 남긴 채 직장을 그만두었다. 오직 한 길로만 달려온 인생, 사람과 제도에 지친 육신과 숨 가쁘게 달려온 내 영혼을 우선 위무해 주고 싶었다. 처음엔 달라진 길에 대한 낯섦과 설렘 속에 이곳저곳 여행도 하고, 등산과 운동도 하고 영화랑 책도 보면서 변화된 삶을 양껏 누렸다. 그리고 온갖 자연이 버무러진 산방에서 새와 나무와 꽃들과 작은 짐승들과 눈을 맞추곤 했다. 

아직도 친해지지 않은 벌레와 짐승들에겐 무섭고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들은 또 자기네들 사는 세상으로 홀연히 쳐들어온 우리 인간 침입자가 얼마나 두렵고 미울까. 드디어 2010년 우린, 미뤄두었던 본채 공사를 시작하였다. 누마루가 있는 목구조 한옥을 설계하고 9월부터 겨울 내내 이듬해 3월까지 기둥과 보, 서까래 등 수만 재의 나무를 남편과 목수 둘이서 재고 깎았다. 4월부터 목수 두 사람이 추가되어 숙식하며, 때아닌 사월의 폭설, 여름 장마와 폭염을 겪으며 10월까지 중장비 투입 등 파란만장한 작업이 계속되었다. 2011년 10월 25일 마침내 본채가 완성되었다. 한옥이라 생각보다 집의 규모가 커 마을과 자연에 거슬리지 않을까 염려되었지만,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열린 집이라 걱정했던 것보다 지리산과 잘 어우러졌다. ‘문향산방’이라는 당호를 새긴 바위를 집 앞 감나무 아래 세우니, 바랑 하나 짊어지고 산속 어딘가를 향하던 스님이 멈춰서 가는 곳의 방향을 물어올 것만 같았다. 처음엔 우리를 바라보는 마을 분들의 시선이 다 우호적이진 않았는데 본채가 완성되는 동안, 꾸준히 한 잔의 차와 미소로 먼저 다가가 인사드리니 점점 마음을 열어 소소한 도움들을 주셨다. 그간 애써 가꾼 농작물이 새와 두더지와 고라니와 꿩, 산돼지들의 먹이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도시 촌놈인 우리는, 농사랄 것도 없는 텃밭과 과수 몇 그루를 가지고 늘 바쁘고 지치고 땀에 절어 허덕이곤 했다. 계속 물어보고 곁눈질해 가며 머리보다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제 봄이면 녹차, 6월엔 매실을, 가을엔 대봉감과 곶감을 만들어 우리도 먹고 지인에게 나누어줄 정도는 된다. 

“천혜의 호화로운(?) 자연환경을 지닌 선돌 마을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2021년 마을미술관 개관 이전까지 예술문화의 혜택이라곤 전혀 없었던 작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미술관이라는 문화공간이 생김으로써 우리 마을은 미술관을 중심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그동안 근처에 귀촌한 이웃들이 생기고 마을 체육행사나 주민잔치, 요가 활동 등에도 참석하여 주민들과도 소통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단순함이 행복’이라는 말과 ‘자연은 결코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자연에 감사하고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앞쪽으로는 아름다운 평사리 들판과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을 품고, 뒤로는 명산 지리산을 업은, 이런 천혜의 호화로운(?) 자연환경을 지닌 선돌 마을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2021년 마을미술관 개관 이전까지 예술문화의 혜택이라곤 전혀 없었던 작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미술관이라는 문화공간이 생김으로써 우리 마을은 미술관을 중심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기획 작가님과 마을지도자분들이 협의하여 오래된 마을의 공동창고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이었는데 작품 전시는 물론 강사를 초빙하여 주민들이 작품 활동도 하고 있으며 원주민과 귀촌 주민들의 화합과 교류의 장소로도 미술관이 활용되고 있다. 나를 포함 귀촌 주민 다섯도 이곳 미술관에서 수업도 하고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는데,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 하루하루 발전하고 변화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내 나이 육십하고도 다섯, 그저 평안하고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살고자 했지만 지금은 다른 삶을 살게 한 곳이 이 마을이다. 예술과 문화가 움트는 마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로 거듭나는 우리 선돌 마을의 자랑거리는 여기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무엇보다 마을의 지도자분들과 주민들이 우리 도슨트를 ‘미술관의 꽃이요, 선돌 마을의 보배’라며 매우 자랑스러워하신다. 도슨트로, 마을을 찾는 분들께 미술관의 운영과 역할, 우리 마을의 스토리를 전하면서 우리 지역사회를 위해 무언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나이 많음은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굽이치는 삶의 질곡에서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 멋진 하동에서 맞이하는 중이다. 앞으로 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기대하면서 사는 삶이다. 무슨 할 말이 많은 듯 녹차 밭 어린 찻잎들이 연신 부리를 쫑긋거린다. 내 머리 위로 푸른 허공에 길을 내며 가는 새들, 뼛속마저 비워야 날 수 있다며 더 낮게 나를 낮추고 또 비우라 한다. 이 아름다운 하동, 먼 길 찾아온 벗들을 위해 찻물을 올린다. 연둣빛 차향이 온몸에 스며드는 봄이다. 글/하동군 제공 정리/하동뉴스 hadongnews84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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