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헛것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헛것
  • 하동뉴스
  • 승인 2023.12.2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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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것

                              조창환

?저것이 헛것인 줄 알기까지
한 세월이 지났구나

밝았던 얼굴, 낭랑했더 음성
눈부셨던 둘레에

헛것 가득 찬 줄 알기까지
한평생이 걸렸구나

벼락, 천둥인 줄 알았던 것도 헛것이고
젖은 신발인 줄 알았던 것도 헛것이고

모래도 헛것이고, 티끌도 헛것이고
흰 살결도, 검은 눈물도, 꽃도, 안개도

절집도, 성당도, 학교도, 국가도
아직 오지 않은 천년도

모두 헛것이었구나.
헛것인 줄 알기까지 한평생이 걸렸구나


-시집 『건들거리네』(동학사, 2023)

【시인 소개】
조창환 / 1945년 서울 출생.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빈집을 지키며』 『라자로 마을의 새벽』 『저 눈빛, 헛것을 만난』 『건들거리네』 외 다수. 한국시인협회상, 한국가톨릭문학상, 경기도문화상 등 수상.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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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기묘년도 저물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마음은 착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쉬지 않고 뛰었는데, 손에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헛것을 쫓은 것처럼 허무하고 허망하지요. 해는 저물고 마음만 조급해지는 시간입니다. 
지금 팔순의 시인은 ‘헛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추구했던 것들이 헛것인 줄 아는 데 평생이 걸렸다는 겁니다. 밝았던 얼굴은 어두워지고, 낭랑했던 음성은 탁하고 갈라지고, 내가 이루었다고 자부했던 것들도 죄다 헛것이더라는 거지요. 벼락도 천둥도 헛것이고, 모래도 티끌도 헛것이고, 꽃도 안개도, 학교도 국가도, 심지어 아직 오지 않은 천년조차도 헛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헛것 아닌 게 뭘까요? 헛것의 반대는 아마도 실체나 실상일 텐데 그게 뭐냐는 거지요. 그걸 알아야 우리가 헛수고 안하고 내년 이맘때는 충만한 마음으로 세모(歲暮)를 맞지 않겠어요? 하지만 알 수 없지요. 이게 정답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왜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 허망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새로울 수 있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건 그래서 축복일 수 있지요. 새해에도 우리는 이 헛것의 힘으로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박경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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