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 검두마을서 인생 2막 여는 박영길 씨 부부
화개 검두마을서 인생 2막 여는 박영길 씨 부부
  • 하동뉴스
  • 승인 2019.01.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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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는 없지만 지역에서 천사
소리 없는 숨은 무한봉사자로 정평 나

‘바늘 가는데 실 간다’란 말이 있고 천생연분이라는 말은 종종 전해 듣고 있다. 이 같은 말들은 하동군 화개면 검두마을로 귀촌한 박영길(77) 씨 부부를 두고 하는 말 갖기도 하다. 이들 부부는 70대 평생 동안 도시생활만 해오다 제2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을 시작하기 위해 뒤늦게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 기슭의 공기 좋고 물 좋은 고장 알프스 하동으로 귀촌을 마음먹었다. 박 씨 부부는 결혼 후 53년 동안 삶을 살아오면서 언제나 바늘과 실이 되어 왔었다고 전언했다. 어릴 때는 가난으로 힘든 청년생활을 보내야 했다는 박 씨는 어린 시절 가난으로 힘들고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제2 인생시작 점에서부터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제2 고향인 하동군 화개면 검두마을에서 무한봉사를 하겠다는 각오라고 했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웃음을 보이고 내가 먼저 양보를 하면 이 세상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제2 고향인 하동 악양면 검두마을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고 자랑했다. 농촌생활이란 곧 문화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고 있기에 이 또한 긍정적인 마음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박 씨 부부는 “여기(하동군 화개면 검두마을)로 귀촌한 것이 70평생 동안 잘한 것에 포함이 된다”면서 “먼 곳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먼저 챙기는 것으로 남은 일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제2인생 시작점에서는 다소 외롭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박 씨 부부와 검두마을 주민)들이 있기에 큰 문제는 없다며 이(검두마을) 곳에 온 것(삶의 터전)이 정말 다행이자 잘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앞으로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능기부도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가족으로는 부인과의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다음은 박영길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이 곳(하동군 화개면 검두마을)으로 귀촌을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우연찮게 지리산을 찾았다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하동군 화개면 검두마을을 알게 되었고 집터를 찾게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달라 =내가 벌써 인생 70대 후반에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일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도시생활을 접고 싶었다. 무엇보다 인생 2막을 아내와 함께 농촌에서 오순도순 재미나게 지내고 싶어서 귀촌을 결심했던 것이다. 더욱이 도시생활로 인한 호흡기 곤란 등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70대 중반을 넘어서 귀촌을 했다. 좀 늦은 편은 아닌가? =맞다. 좀 늦었다. 하지만 늦은 것이 지금은 오히려 더 빠른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뀌어 진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왜 하동지역이었나 =하동은 무엇보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내(박 씨)가 평소에도 사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제 2의 인생시작점을 어디서 할 것인지 찾다가 지리산과 섬진강이 위치한 하동에 흠뻑 빠졌다.

▲부인에게 귀촌을 이야기했을 때 받아들였나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부부 문제를 해결했나 =우리 부부는 오래전부터 도시생활을 해 왔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도시생활을 벗어나기 싫어서 귀촌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다 아내와 가족들에게 끈질긴 설득으로 동의를 받았다.

▲귀촌을 위한 누구의 도움이 가장 컸나. =아내의 도움이 가장 컸지만 그래도 자녀들이 적극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귀촌 전에는 어디서 생활했나. =울산광역시 중구다.

▲귀촌 후 지역민과의 어려움은 없었나. =없었다.

▲왜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를 전해 달라 =나(박 씨)는 귀촌 이전에 귀촌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왔었다. 그게 귀촌 후 지역민들과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역민과의 유대관계(스킨십)는 어떻게 했나. =특별한 게 없다. 내가 먼저 잘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보니 지역민들도 주민으로 받아 주었던 것 같다. 지면을 통해 주민들께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역민과의 유대관계 중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 만 이야기 해 달라 =(이야기를 해야 될지 모르겠다) 내가 조금 더 낮추고 좀 더 배려했기 때문이 아닌 가 싶다.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늘 언제나 똑같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박 씨는 말했다.

▲귀촌은 언제 했나요. =지난 해 6월13일이다.

▲주택을 새로 건립했나요. =네

▲주택을 새로 건립했지만 대부분이 직접 지어신거라면서요 =(웃음)도시생활을 하면서 공장건립을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택 건립에도 반 목수는 되지요. 지금 이 집도 자신이 조언해서 지은 집이라고 박 씨는 설명했다.   

▲주택을 새로 건립했는데 그동안은 어떻게 생활을 했나요. =아내는 울산에서 생활하고 나(박 씨) 혼자서 인근에 움막을 치고 생활을 해 왔어요.

▲움막생활은 얼마정도 했나요. =6개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불편이 없었나요 =왜 없겠습니까. 아내가 반찬을 만들어 주면 가져 와 먹었습니다. 특히 이게 내가 원하고 바라든 인생 2막의 삶의 터전이어서 힘들어도 힘들지 않고 어려워도 어렵지 않았다고 박 씨는 말했다.

▲그럼 움막생활을 하면서 지역민들과 많이 만났겠네요. =네. 매일 주민들과 만났지요.

▲사실상 이 때부터 귀촌을 한 셈이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주택을 건립할 동안 움막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주민들과의 소통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주민의 80% 이상은 알고 지내고 있습니다.

▲당시 주민들과의 유대관계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나요 =처음에는 많이 어색해 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주민으로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주민들과의 소통방법은 어떻게 했나요. =늘 언제 어디서나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고 먼저 안부를 물었다고 박 씨는 전언했다.

▲농촌생활 불편은 없나. =큰 불편은 아직까지 없다. 그러나 문화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불편하다. 더 이야기를 하자면 아직까지는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잘 견디고 있다고 박 씨는 말했다.

▲하루 일과를 이야기 해 달라 =오전과 오후 1회씩 걷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탄다. 또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알프스 하동종합복지관을 찾아 체험프로그램을 이수한다. 가끔은 아직 미흡한 집안일들을 하고 있다.

▲도시생활에 비해 농촌생활을 하면서 생활비가 많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의 생활비용은 어떻게 마련하나 =그동안 모은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 자녀들로 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지역을 위한 무한봉사도 한다면서요. =부끄럽습니다.

▲어떤 봉사인가요. =단순히 지역민을 위한 봉사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예로 검두마을 행복둥지나 경로당에 어르신들의 이용불편 해소를 위해 식탁이나 의자를 구입해 기증을 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경로당을 방문했는데 어르신들이 식사를 하면서 식탁이 없이 탁자(상)에다 식사를 하고 있어서 식탁을 구입했습니다.

▲또 이외에 봉사도 있다면서요. =민민 체육대회와 마을주민 야유회 등에 봉사를 한 것이 전부입니다.(박 씨는 이 같은 이야기를 거론한 것에 대해 비 보도를 요청했었다)

▲인생 2막이 시작됐다. 감회는 =그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처다 보고 달려왔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온 만큼 편안한 삶을 살고 싶다. 지난 45년 동안 함께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려니 정말 싫었다. 무엇보다 부인과 가족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일단 하동으로 왔다. 앞으로는 지역민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여기에 여유가 있다면 주변을 챙기는 사람(주민)이 될 생각이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만큼 노력해 나갈 것이며 봉사는 물론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따뜻한 정을 나누도록 사랑을 베풀어 나갈 계획이다.

▲앞전 (울산시) 지역에서도 많은 봉사활동을 했다고 들었는데 간단하게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나요. =저(박 씨)는 사업을 하다 보니 봉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부인은 향교 등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에 참여를 해 왔었다고 말했다.

▲현재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학원을 다니거나 공부를 했으면 한다.

▲어떤 공부며 그 이유를 여쭈어 봐도 될까요. =영어나 중국어 등 외국어다. 비록 잘은 못하지만 계속해서 배워서 지역에서 개최되는 각종 축제 때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재능기부를 통한 관광안내 등을 하고 싶을 뿐이다.

▲고향은 어디인가? =김해시다.

▲하동으로 귀촌을 하기 전에 어디서 어떻게 생활을 해 왔나 =당시 젊은 나이인 28세 때 부산에서 금형 공장을 설립해 운영을 해 오다 김해시로 공장을 옮겨 다시 울산광역시로 옮겼다. 생산된 제품은 대기업에 모두 납품을 했다. 22년 동안 울산광역시에서 공장을 운영했었다. 공장도 아주 잘 됐다.

▲그런데 왜 공장 경영 일을 그만두었나. =그 당시 몸이 좀 안 좋았다. 그래서 사업을 사실상 접었다.

▲이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울산광역시 학성동에서 대형 목욕탕(사우나 포함)을 운영했다.

▲얼마나 이 목욕탕을 운영했나요 =17년 정도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건강이 좋지 않아 사업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나요. =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당시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스트레스로 인한 일상적인 현상이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간 사업을 하면서 가장 보람(재미)을 느낀 때는 언제였나요. =본인(박 씨)과 함께 경쟁자로 납품을 해야 할 때 경쟁자보다 제품이 우수하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가 가장 좋았다. 특히 내가 직접 개발한 제품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을 때였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 =크게 힘들 때는 없었지만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가끔 공장 운영 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와 제품이 불량으로 나올 때가 아닌 가 싶다.

▲대한민국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인가 =모든 국민들이 정직, 성실, 근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2 인생 시작점에서 출발했다. 검두마을에서의 삶은 어떻게 보냈으면 하는가? =삶을 다하는 날까지 주민과 화합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도와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달라 =먼 곳을 바라보지 말고 가까운 곳을 먼저 보라는 말이 있다. 내(박 씨)가 바로 그런 글귀를 본 받아야하지 않는 가 생각한다. 내가 거주하는 검두마을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나갈 것이다. 강정배 기자 kjb34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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