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일 칼럼]6월의 교훈
[박영일 칼럼]6월의 교훈
  • 하동뉴스
  • 승인 2019.06.1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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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의회 7·8대의원
교육사회위원장  박 영 일
 
 장미의 계절 6월은 이해인 수녀님의 “6월의 장미”로 시작된다.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중략>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중략> “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워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 하십시오” 

 누구를 한번씩 용서 할 때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는 시기는 모두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지만 6월은 우리에게 굴곡이 많은 계절임은 확실하다. 1950년 비극의 날 6·25, 1957년 6·21일 군비축소 파기선언, 1987년 6·10항쟁, 6·29선언,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등은 우리에게  시사한 바가 커지만 지금 세대는 6·25를 비롯한 사건들을 기념일 정도로 알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바퀴 속에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한번쯤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해방 후 한반도에 두개의 정부가 들어서고 1949년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해 모택동이 정권을 잡고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어 정국 불안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미군 철수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미국의 “애치슨라인” 설정 등으로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하게 되었다. 이에 편성 북한은 군사력 증가를 위해 소련, 중국과 군사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비행기, 탱크 등 지원을 받았으며 중공군은 조선의용군 4만여 명을 북한인민군에 편입 시켰다. 이 무렵 38선 주변에서 874차례의 크고 작은 남·북한 충돌도 있었다. 6·25 발발이후 6·27일에는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대전으로 정부를 옮겼고 7월 하순 경상도를 제외한 전국토가 적군에 점령당해 국가의 미래는 심각한 처지에 놓였다.

유엔의 참전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고,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 많은 어려움 속에 1951년 6월부터 우리를 배제한 채 연합군, 중공군, 북한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진행 되었다. 협상 중에도 소모적 전투는 계속 되었고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과 소련 스탈린 사망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해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년1개월간 양쪽 군인 240여만 명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일반 국민의 희생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물적 피해가 있었다. 한반도가 상처투성이가 된 가운데 38선은 휴전선으로 바뀌고 남북은 이데올로기가 강화 되면서 권력 집중화와 독재 정권들이 들어섰고 분단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큰 교훈을 얻었다. 당사국이면서 휴전협상 테이블에 앉지 못한 것은 힘없고 무능한 국가였기 때문이고, 정치 지도자의 잘못과 국민의 분열이 얼마나 국가 장래에 큰 영향을 주는지 따라 치열한 지구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 있는 강한 국가가 되어야 하며 국민의 하나 된 모습이 절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957년 6월21일 휴전 협정의 군비축소조항의 준수파기 선언으로 남북한이 막대한 군비를 부담하게 되었고, 핵무기로 인한 위협은 우리나라는 물론 주변국까지도 긴장하게 하고 있다. 1987년 6·10항쟁은 10·26사태이후 군사정권을 반대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고 군사 독재정치가 종식되는 계기와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 발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와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되었다.

 1987년 6·29선언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적 정부이양, 야당 정치인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관련 사범 석방, 정당의 건전한 활동보장 등 어느 한쪽의 변혁이나 개혁과는 달리 양자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노태우 정부 때부터 8차례 남북 고위급 회담을 열어 남북기본합의서를 받아 내는 성과를 바탕으로 김대중 정부 때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으로 정상회담을 가진 값진 결과물이다. 통일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남측의 연합제안,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 제안이 공통성이 있다고 판단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

 1999년 6월15일 제1 연평해전, 2002년 6월29일 제2 연평해전은 북한의 우리 관할 해역과 북방한계선 침범으로 전투가 벌어졌으며 특히 제2 연평해전은 6·15 공동선언을 무색케 했다. 장미의 계절 6월은 우리 민족에게 교훈을 많이 주는 한 달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6·25는 우리 세대가 경험은 못했지만 그 잔악상은  익히 아는바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끔 부강한 국가, 하나 된 국민의 힘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6·15공동선언, 연평해전, 6·29선언은 우리 세대가 직접 경험한 것들이라 시사하는 바가 크며 국가의 미래, 국민들의 국가관 확립을 위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는 세계선진 대열이지만 북한과 극한 대치로 그렇게 편안한 사항은 아니다. 안보에 한 점의 빈틈이 없어야 하며 자신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국민이 되자. 호국 보훈의 달 6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전몰장병들의 충렬을 기리며 얼을 위로하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연 역사적인 일들과 함께 6월의 교훈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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