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일의 칼럼]11월 3일을 바로알자
[박영일의 칼럼]11월 3일을 바로알자
  • 하동뉴스
  • 승인 2019.11.12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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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의회 7·8대의원
(교육사회위원장)  박 영 일

  우리 한국 학생은 역사적 주체로서 성격이 강하며 6.25때는 조국의 수호를 위해 3만 가까운 학도병이 참전했고 20여만 명은 후방에서 봉사, 치안유지, 들뜬 민심을 수습하는 활동을 했다. 80년대는 민주화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역시 일제 강점기에도 이들은 조국을 수호하는 아들, 딸들이었다. 매년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항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서 학생들에게 자율적인 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기 위한 정부 주관 기념일 중 하나다.

1953년 10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학생의 날로 제정 1973년 기념일 통폐합 관계로 폐지되었다가 1984년 재지정 2006년 기념일 명칭이 지금의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확정되었다. 요약하면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등이 당시 광주여고보 3학년 재학 중이던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 우리나라 여학생들의 댕기꼬리를 잡아당기며 희롱을 했다. 이때 함께 있는 박기옥 사촌 남동생 광주고보 2년생 박춘재와 싸움이 일어났고 급기야 나주역전에서 광주고보생들과 광주중학교(일본인학교) 학생들 간의 집단 싸움으로 변해 싸움이 확대되자 일본 순경이 출동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 편을 들고 박춘재를 구타하는 등 민족차별이 심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우리학생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과 차별교육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이 바로 우리민족의 얼이 담긴 광주학생운동 도화선이 되었다.
 
피해자중 한사람이었던 박기옥도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주도해 시위에 참가 일본 만행을 규탄했다. 11월 3일은 ‘메이지’ 일본왕의 생일인 ‘명치절’이라 기념행사에 강제 동원된 수많은 학생들이 시내에 운집해 있어 집단행동을 하는데 좋은 기회였다. 일부 학생들은 편파적으로 사건을 보도한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를 훼손하는 등 격하게 항의를 하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우리 학생 수십 명을 무차별로 체포했다.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학생들의 시위 및 체포 소식은 신간회(1920년대 후반 좌?우익이 합작해 결성한 항일단체)에 전해졌다. 이들은 광주지역의 여러 학생들의 비밀조직과 모임을 가져 좀 더 체계적이고 규모가 있는 항일운동으로 이어갔다. 

  11월 11일 저녁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운동 동참을 독려하는 격문이 곳곳에 뿌려졌고 다음날 광주사범학교 광주여고보,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시위가 일어나 국민들의 울분을 대변했다.
한반도의 내일을 위해 그들이 일제에 주장한 내용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시위의 자유보장 민족문화와 사회 과학 연구의 자유보장 등 9개 항목이었다.

일본은 우리 학생들의 주장과 시위를 트집 잡아 수백 명 학생을 체포 구금하여 고문하고 가족을 협박하며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광주지역의 시위는 목포, 나주 등 인근지역을 넘어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2월 2일에는 서울을 비롯 전국 곳곳에서 동포들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뿌렸고 수많은 학교와 학생들은 동맹휴교를 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어른들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일을 학생들이 해냈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항일독립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 사회지도자들도 적극 지원했고 경찰의 탄압은 극에 달해 구속자는 늘어나고 이들은 큰 고초를 겪었다. 당시 학생 수에 비해 아주 많은 194개교 5만4천여 명이 거국적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11월 3일 학생운동이 3.1운동이후 일어난 가장 큰 저항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광주학생들의 독립운동의 진정한 의미는 일본학생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라는 것을 구국운동에서 찾아야 한다. 급변하는 무한경쟁의 글로벌시대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인 학생독립운동을 바르게 가르치고 학생운동 정신이 주는 교훈을 배워 익히도록 해야 하고 위정자를 포함한 지금 세대도 깊은 반성과 건설적인 언행이 필요하다.
지금 일본은 그때보다 더 믿을 수 없는 나라고 자국의 이익이면 주저 없이 반칙을 하며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관 확립과 하나 된 모습을 보이고 국격을 높여야 한다. 스스로 우리를 지켜야하고 국제사회는 영원한 내편이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학생들은 현명하고, 용감했고, 정의로웠다. 그 시절 조국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심! 지금 세대는 반성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자.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 못하고 남의 탓 만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지금의 세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받친 그들과 미래세대는 훗날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1929년 11월도 한반도 하늘은 맑고, 아름다운 단풍으로 장식되어 있는 가을이었다. 오늘날처럼 자유롭지 못하고 숨 막히는 일제치하였지만 조국을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대단했었다. 11월 3일 “학생독입운동기념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아픔을 보듬고 제대로 알고 잊혀져 가는 아쉬움에 마음 아파하는 국민이 많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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