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새해의 기도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새해의 기도
  • 하동뉴스
  • 승인 2020.01.2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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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기도
                               이성선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 『이성선 시전집·1』(시와 시학사, 2005)

【시인 소개】
이성선 / 1941년 강원도 고성 출생. 1972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인의 병풍』,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등 다수가 있음. 그의 작품세계는 전통적인 서정성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시와 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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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의 화자는 새해를 맞아 신에게 다섯 가지를 빌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기도는 첫 번째 기도입니다. 첫 번째 기도가 이루어져야 나머지 기도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르지 않게 해달라는 게 그것입니다. 이것도 기도인가 싶지만, 이것처럼 중요한 게 없지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살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도 어렵지요.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허둥댑니다. 어딘가로 밥벌이하러 가야 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오고, 피곤한 육신을 뉘어야 하지요. 이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지요.
누구나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내 마음의 무늬를 살피면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영혼의 감로수를 길어 올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높이 비상할 수도 있고, 영원을 노래할 수 있고, 고독하게 신을 흉내 내며 시인처럼 살 수 있지요.
올해는 부디 서두르지 않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한 편의 시가 꽉 짜인 일상에 작은 틈새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틈새로 꿈꾸던 세상이 보일 겁니다. 하여 ‘시로 여는 세상’이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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