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달팽이는 집이 있어 행복할까
[김남호의 시로 여는 세상] 달팽이는 집이 있어 행복할까
  • 하동뉴스
  • 승인 2023.09.2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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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는 집이 있어 행복할까

                                                            곽도경

상추 잎에 달팽이 한 마리 붙어 있다
작은 몸에 형벌처럼 집 한 채 짊어지고
긴 귀를 안테나처럼 뽑아 올린 그는
발이 없다
무거운 집을 지고 일생 배밀이만 하다가
어느 날 집과 함께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그는 집이 있어
행복할까
살고 있는 집 8할을 대출로 구입하고
치솟은 금리 때문에
퇴근 후 대리운전을 뛴다는 김 과장
하루 24시간 집을 지고 다닌다
길 위에 녹아내린 그의 맨살
축축하다


- 《詩하늘》(2023년 가을호)


【시인 소개】
곽도경 / 시인, 화가. 계간 《시선》으로 등단. 시집 『풍금이 있는 풍경』, 시화집 『오월의 바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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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쉽게 달팽이를 ‘집 있는 달팽이’와 ‘집 없는 달팽이’로 분류합니다. 생물학적 특성이 아닌 집의 유무로 어떤 종을 분류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유독 집에 주목해서 본다는 건 우리에게 집이 그만큼 중요하고 절박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집은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하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 집 하나 장만하는 건 필생의 과업입니다. 8할을 대출받아서 집을 마련하긴 했지만, 날로 치솟는 이자 때문에 월급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라서 퇴근 후에는 대리운전이라도 해야 하는 김 과장의 모습은 집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낮에도 밤에도 오로지 집에 매달려야 하는 김 과장에게 집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굴레이고 족쇄일 것입니다. 누가 그에게 집이 있어서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할까요?
무거운 집을 짊어지고 배밀이하며 살아가는 달팽이와 대출받은 빚을 갚느라 밤늦도록 어둠속을 질주해야 하는 김 과장은 어떻게 다를까요. 자기 몸으로 자기 집을 지을 수 없는 족속, 그래서 집이 곧 짐이 되는 족속이 인간 말고 또 있을까요. 어둠이 내리고 아파트 칸칸마다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간에 누군가는 그 불빛 한 칸 장만하려고 핏발선 눈을 부릅뜬 채 어둠속을 달려가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낮은 길은 맨살처럼 축축한가 봅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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